"소녀는 '여자'가 돼야 했다"..배스킨라빈스 광고, 진짜 문제는

글 이보라 기자·영상 이재덕 기자·석예다 인턴PD·채용민 PD 2019. 7. 1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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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배스킨라빈스 ‘핑크스타’ 광고(왼쪽)와 여성용품 ALWAYS의 ‘LikeAGirl’ 광고(오른쪽)

“아이스크림 먹는 게 왜 성적 대상화인가요? 예쁘기만 한데…” “세상에 어떤 어린이가 화장을 저렇게 하고 아이스크림을 저렇게 먹음? ” 지난달 30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배스킨라빈스, 유명 어린이 모델 ‘성적 대상화 논란’ 광고 삭제·사과> 기사에 달린 댓글들입니다.

관련 기사-배스킨라빈스, 유명 어린이모델 '성적 대상화 논란' 광고 삭제·사과

아이스크림 브랜드 배스킨라빈스의 신제품 ‘핑크 스타’ 광고로 온라인이 떠들썩합니다. 배스킨라빈스 측은 광고를 삭제하고 사과했지만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데요. 광고 속 영상에 나온 소녀 모델을 ‘성적 대상화·성 상품화했다’는 비판 여론과 함께 ‘선정적이지도 않고 예쁘기만 한데 뭐가 문제냐’는 의견도 나옵니다.

도대체 이 광고, 뭐가 문제일까요? 광고를 둘러싼 문제를 다각도로 살펴봤습니다.

■현실에 없는 그 ‘소녀’

광고 속에서 11세 소녀는 어깨가 드러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습니다. 입술에 분홍색 립스틱을 칠하고 풀 메이크업을 한 채로 말입니다. 화면을 보고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매혹적인 표정을 짓습니다. 카메라는 머리카락에 감춰졌던 소녀의 목덜미를 담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떠 먹는 소녀의 분홍빛 입술을 클로즈업합니다.

‘이게 뭐가 문제야? 선정적이지도 않고 예쁠 뿐인데?’라는 누리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에 저런 소녀들이 실제로 있는지를 말이죠. 광고 속 발랄하고 예쁘게 꾸민, ‘어린 여성’ 같은 소녀는 사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보통 11세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인 거죠.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소녀 상(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배스킨라빈스의 진짜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톡톡 튀는 상큼함과 핑크핑크한 느낌을 표현하는 데 성인처럼 꾸민 어린 여자 아이가 적합한 이미지가 됐다는 점이다. 실제 11세 여자 아이를 만나 보면 톡톡 튀는 상큼함이나 핑크핑크함, 성인 여성과 흡사한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른들이 만든 환상이다. 문제는 점차 우리 사회가 여자 아이에게 이런 이미지를 기대하고, 여자 아이 스스로도 이런 이미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특정한 소녀(여성) 상은 대중매체 콘텐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녀(여성)의 외모, 성격, 역할 등을 획일적으로 규정하는 내용이 그런데요.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모임의 분석에 따르면 2015~2018년 3년간 교육방송(EBS)에서 방영된 만화영화 시리즈 35개 중 23개(65%)에 성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는 표현과 설정이 담겼습니다.

EBS 만화영화 <로보카 폴리>에 등장하는 여성 로봇. EBS 홈페이지 캡처

<로보카 폴리>에서 주요 로봇 4명 중 하나 뿐인 여성 로봇 ‘엠버’는 핑크색을 띱니다. 남성 로봇들이 리더를 맡거나 구조 때 큰 역할을 하는 등 중심 역할을 할 때 엠버는 주로 부상 당한 자동차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플라워링 하트>의 경우 뚱뚱하다고 놀림 받는 여자아이의 문제 해결 방법으로 다이어트가 제시됩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자 외모를 예쁘게 꾸미라는 조언을 받죠.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30조에는 방송에서 특정 성의 외모, 성격, 역할 등을 획일적으로 규정해선 안 된다고 나와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소녀는 ‘여자’가 돼야 했다”…불행해진 아이들

‘광고니까 현실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런 반론도 있습니다. 물론 광고는 현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매체가 아동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광고를 쉽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광고 규제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광고와 같은 대중매체는 아동·청소년의 정체성과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국 아동단체 더칠드런스소사이어티가 요크대와 협력해 2015년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특히 아동의 성 고정관념, 그와 연관된 행동과 기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단체가 한국을 포함한 15개국 대상으로 대중매체를 접한 8~18세 아동·청소년 5만2000명을 조사한 결과, 2015년 기준 한국 아동·청소년은 15개국 중 가장 자신의 외모에 관해 불행하다(13%)고 답했습니다. 자신의 신체 상에 관해서도 12.8%가 불행하다고 답하며 신체 만족도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낮은 자신감으로 이어지기까지 했습니다. 한국 아동 12.7%가 그들의 자신감에 대해 불만족스럽다고 답하면서 15개국 중 14위에 머물렀습니다.

영국 아동단체 더칠드런스소사이어티가 요크대와 협력해 2015년에 발표한 연구 결과. 한국이 신체 상, 외모, 자신감에서 낮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더칠드런스소사이어티 제공

하버드의과대학원의 조사 또한 눈여겨볼 만 합니다. 이 대학원 소속 앤 배커는 1995년 피지 섬의 소녀들이 가지는 신체 상에 대중매체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습니다. 1990년 초반 당시 피지에는 TV와 같은 대중매체가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피지 여성들은 다이어트나 운동을 통해 날씬한 몸매를 가져야 한다는 문화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았죠.

하지만 1995년 미국의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TV가 보급된 직후인 몇주 동안과 그 3년 후 피지의 소녀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1995년에는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구토하는 소녀는 없었지만 1998년에는 11%의 소녀가 일부러 구토했고 74%가 스스로를 너무 뚱뚱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했습니다. 대중매체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소녀는 ‘여자’가 돼야 했다. 하루아침에 ‘여자’가 돼버린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세상의 규격에 내 몸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의 몸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됐다. 분명 TV 속의,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여자’는 피부가 희고 털이 없는데, 가슴과 엉덩이는 크면서 허리는 잘록한데, 젖꼭지가 핑크빛이고 짝짝이가 아닌데 나는 왜?”(양지혜, 책 <걸 페미니즘> 중)

더칠드런스소사이어티 조사에서 소녀들도 이같이 토로했습니다. “소녀들은 외모와 관련해 덜 행복해요. 소녀들이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를 대중매체가 그리는 방식 때문에요.”(10세 소녀) “대중매체와 유명한 여성 때문에 소녀들에 대한 높은 기대가 있어요.”(10세 소녀)

댓글에는 소녀 모델을 성적 대상으로 욕망하고 희롱하는 내용이 주로 담겨 있습니다. 배우 나탈리 포트만도 어린 시절 영화 <레옹>을 찍은 뒤 숱한 성희롱에 시달렸다고 고백했죠. 잘못된 대중매체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소녀들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은 2일 배스킨라빈스 광고를 다룬 기사와 온라인 커뮤니티 글에서 성희롱 댓글을 모아 공개했다. 한사성 제공

■“용감한 애, 똑똑한 애, 힘센 애=소녀”

해외는 대중매체가 소녀 상과, 그에 따른 성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영국은 2018년부터 18세 미만 아동의 성상품화 광고에 대해 규제를 강화했고, 지난달에는 전반적인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광고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광고 규제 당국인 영국광고표준위원회(ASA)는 성명에서 “해로운 고정관념이 어린이, 청소년·성인의 선택, 열망과 기회를 제한할 수 있고, 이런 고정관념이 광고에 의해 강화될 수 있다”며 규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여자 아기는 발레리나로, 남자 아기가 엔지니어로 성장하는 광고는 더 이상 영국에선 찾아보기 어려워집니다. 기저귀를 갈 수 없는 남자, 남자가 소파에서 발만 드는 동안 청소하는 여자, 주차를 잘 못하는 여자와 같은 내용도 금지되기는 마찬가집니다. 앞서 ASA는 2011년 성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배우 다코타 패닝의 향수 광고와 2016년 ‘노바디스 차일드’ 의류 광고를 금지 조치한 바 있습니다. 모델이 아동·청소년의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보여 아동·청소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죠.

최근 들어 대중매체 콘텐츠도 조금씩 변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성이 영웅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캡틴 마블>과 원작과 달리 자스민 공주가 통치자인 ‘술탄’이 되는 영화 <알라딘>이 그렇습니다. 만화영화 <토이스토리>도 마찬가집니다. <토이스토리> 전편에 나왔던 여성 양치기 인형인 ‘보핍’과 이번에 개봉한 <토이스토리4> 속 보핍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전통적인 여성상을 대표하던 보핍은 냉철한 판단력과 침착함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인물이 됐죠.

영화 <토이스토리4>의 보핍. 스틸 컷

성 고정관념이 가득한 전래동화를 재해석하려는 행보도 나타납니다. 최근 출간된 책 <선녀는 참지 않았다>에서 ‘선녀와 나무꾼’은 목욕하던 선녀를 훔쳐보던 나무꾼이 강한 힘을 지닌 선녀들에게 잡혀 벌을 받는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렁이가 노총각에게 식사를 차려준다는 ‘우렁각시’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던 용왕의 아들인 우렁이가 혼자 사는 여성의 집에서 몰래 밥을 차려준다는 내용이 됐습니다.

“많은 서사의 여성 캐릭터들은 ‘상식적이어서 수동적이고 보조적인 리액션 캐릭터’에서 이제 ‘상식적이어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발돋움하고 있다. 썩 개성은 없지만 멋 있는 게 개성인 여성 주연들이 충분히 자리 잡고 나면, 이제 어디 하나 모자라지만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여성 캐릭터들도 점점 나타날 것이다. 용감한 애, 똑똑한 애, 힘센 애, 비열한 애까지 다 여자들이 하고 있어도 억지스럽지 않고 재미있는 서사도 보고 싶다.”

권성민 MBC PD의 진단은 이번 논란과 관련해 울림을 남깁니다. 이제는 다양한 외양과 성격 특징이 ‘소녀’ 앞에 수식돼도 자연스러운 대중매체 콘텐츠가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소녀들 뿐 아니라 언제나 ‘남자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시달리는 소년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요.

기사는 경향신문의 유튜브 채널 <이런경향-읽씹뉴스> 영상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https://youtu.be/RZe0bTo26U4

글 이보라 기자·영상 이재덕 기자·석예다 인턴PD·채용민 PD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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