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호칭에 취했다..6년만에 사기꾼 전락한 '청년 버핏'

김정석 2019. 7. 1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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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신분으로 수억원 기부해 유명세 탄 박철상씨
6년 만에 사기 혐의로 징역 5년 선고받아 '철창신세'
언론이 만든 이미지 이용해 투자자들 끌어모아 기부
재판부 "개인의 이익과 만족감 위해 기부 이뤄졌다"
주식 투자로 큰 돈을 벌었다고 알려지며 ‘청년 버핏’으로 불렸던 박철상(오른쪽)씨가 지난 2017년 모교인 경북대학교에 5년간 13억5000만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하고 있다. [사진 경북대]
지난 11일 오전 대구지법 서부지원 제33호 법정. 재판을 맡은 형사1부 안종열 재판장이 한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재판정 옆 수감자 대기 공간에서 박철상(33)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씨는 안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는 동안 방청석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방청석엔 피해자로 보이는 4~5명의 남녀가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박씨는 2016년 10월께 투자자 A씨에게 13억9000만원을 받는 등 지인 4명에게 총 18억여원을 가로챈 뒤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지난 2월 구속 기소됐다. 박씨는 받은 돈을 기부사업이나 빚을 갚기 위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피고인(박씨)이 투자받은 돈 상당 부분을 기부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장학사업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속여 피해가 발생했다"며 "목적이 아무리 도덕적이라고 해도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었고 그것이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앞서 검찰이 구형한 징역 10년에서 절반이 준 형량이었지만 그래도 중형이었다.

박씨는 한때 자신의 이름 옆에 ‘청년 워런 버핏’ ‘청년 기부왕’ 등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1000여만원을 자본금으로 주식을 해 400억원대의 자산가가 됐다고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그렇게 번 돈을 통 크게 기부하면서 평범한 대학생의 ‘성공 신화’로 자리매김하는 듯 했다.
박철상씨. [중앙포토]

그랬던 그가 세상에 알려진 지 불과 6년여 만에 사기 피고인으로 전락했다. 태양 가까이 날아갔다가 추락해버린 신화 속 이카루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동안 그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박씨가 처음 언론에 등장한 건 2013년 1월이다. 자신이 재학 중이던 대학에 1억원을 기부하면서다. 평범한 대학생이 거액의 돈을 기부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목이 쏠렸다. 2년 뒤인 2015년 2월 박씨는 한 번 더 모교에 장학금을 기부했다. 이번엔 기부액이 4억5000만원(5년 약정)으로 늘었다.

같은 해 7월 그는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5년간 총 3억6000만원의 기부를 약속하고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에도 가입했다. 대학생 신분으론 최초였다. 이듬해 미국 포브스지의 ‘2016 아시아 기부 영웅’에도 이름을 올렸다. 2017년 8월 또 다시 모교에 5년간 총 13억5000만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주식에 투자해 수백억원의 자산가가 되고, 그렇게 번 돈을 수억원씩 통 크게 기부하는 한 대학생의 인생 이야기는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박씨가 중학교 때 모의투자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 홍콩 투자사 인턴으로 스카우트됐다는 이야기도 언론을 통해 조명됐다. 박씨가 다른 이들로부터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던 일종의 ‘공신력’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의 ‘성공신화’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덴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청담동 주식 부자’ 이희진씨의 실체를 밝힌 인물로 유명한 주식 투자가 신준경(46)씨가 2017년 8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박씨의 주식 투자 성공 스토리에 의혹을 제기했다. 신씨는 “실제로 400억원의 자산을 주식으로 벌었다면 박씨는 증거를 제시해 달라”며 포문을 열었다.

박씨의 첫째 대응은 강한 부인이었다. 그는 신씨가 의혹을 제기한 지 이틀 뒤 자신의 SNS에 “엊그제부터 저에게 수익 계좌를 보여 달라고 아이처럼 떼를 쓰는 분이 계신데 황당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당시 중앙일보와 통화에서도 박씨는 “장학 활동을 하기도 바쁜데 이런 노이즈 마케팅에 휘말려 곤란하다”고 했다.

의혹 제기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신씨와 박씨가 서로 만나 논란에 대해 대화를 나눈 뒤에야 박씨가 거짓임을 털어놨다. 대화가 이뤄진 다음 날 신씨는 SNS에 “박씨가 주식으로 번 돈이 400억원이 아니라 몇억원 정도”라며 “박씨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기 이름으로 기부했다”고 폭로했다.

신씨는 이어 “그는 후배들에게 영웅으로 남고 싶었고 여러 인사를 만나면서 자신의 신분 상승에 취해 있었다”며 “그 청년(박씨)은 본질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약간의 허언증에 사회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면서 본인이 심취해 버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준경씨가 자신의 SNS에 게시한 글. [자료 페이스북]

실제로 11일 이뤄진 재판에서도 재판부는 “피고인은 주식으로 큰 이익을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기 위해 많은 부를 축적한 것처럼 행세해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속였다. 일부는 자신의 생활비로 사용해 개인의 이익과 만족감을 위해 기부가 이뤄졌다”고 했다. 또 “돌려막기식으로 유치한 피해 금액 대부분이 변제되지 못했다”고 적시했다.

거짓으로 투자자들을 끌려들어 ‘돌려막기 기부’를 했던 박씨. 과연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중에게 비치고 싶었던 모습은 뭘까. 자신에게 의혹이 제기되기 직전인 2017년 7월 22일 그가 SNS에 올린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저는 무엇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원래 가졌어야 하는 분들의 것을 잠시 맡고 있다가 있어야 할 제 자리에 돌려놓는 사람일 뿐입니다. (중략) 저는 이름이나 업적이 아닌, 정제된 가치관과 철학을 남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가 뿌리는 씨앗에서 열리는 열매가 박철상이란 한 개인이 아닌, 사회와 공동체에 고스란히 전달돼 누리길 바랍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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