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관행인데, 왜 나만.." 불법 가리는 법관의 궤변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⑧]

이혜리 기자 2019. 7. 1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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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불법의 평등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일반 국민들의 눈높이에서는 부적절할 수 있으나 재판연구관들이 자료를 개인 외장하드에 복사하고, 소지한 채 다음 근무지로 전근하는 것은 사실 ‘관행’이었습니다. 유독 피고인에 대해서만 문제 삼는 것에 솔직히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난달 10일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53)의 변호인이 법정에서 말했다. 지난 5월27일 첫 공판 때는 유 전 연구관이 직접 이렇게 말했다. “남들이 흔히 하는 대로, 또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늘 하던 대로 제가 직접 작성했거나 자연스레 획득한 자료들을 외장하드에 저장했다가 그대로 소지한 채 퇴직했던 것입니다.”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유출 사실 국민 눈높이엔 부적절하다면서 ‘왜 나만 문제 삼느냐’는 유해용

판사를 그만두면서 대법원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를 가지고 나온 혐의(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를 두고 그는 다른 사람의 불법행위가 묵인됐으니 자신도 처벌받아서는 안된다며 이른바 ‘불법의 평등’을 주장한다. 구체적인 사례도 든다. 대법원 근무 이후에도 검토보고서를 가져갔다는 재판연구관, 대법원에서 참고자료를 가지고 나왔다는 특허조사관의 진술이다. 형평에 어긋나 억울하다고 유 전 연구관은 호소한다.

‘관행’과 ‘남들이 하는 대로’에 기대 변론하는 유 전 연구관은 역설적으로 사법농단 피고인들 중 가장 격렬하게 검찰의 ‘관행’을 공격한다. 그는 “총체적 위법수사”라고 했다.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 비공개 면담 방식의 조사, 별건 압수수색, 언론을 활용한 피의사실 공표, 표적수사, 과잉수사, 영장주의 위반…. 적법 절차가 중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제11조 1항이 불법의 평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25년간 법관을 지낸 유 전 연구관이 누구보다 잘 아는 내용이다.

■ “박근혜 관심”에 일사천리 대응

박근혜 전 대통령

유 전 연구관 혐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의료진 박채윤씨에서 시작한다. 법원에서 특허소송을 진행 중이던 박씨는 상대측 대리인과 기술심리관이 유착해 소송을 유리하게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소위 ‘전관예우’ 문제가 있다는 불만이었다. 기술심리관은 특허소송에서 전문성을 갖고 법관을 돕는 역할을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이 문제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당시 우병우 민정수석-곽병훈 법무비서관-유태석 행정관 순으로 지시가 하달됐다.

청와대 연락을 받은 법원행정처는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박씨 상대측 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다래의 특허소송 수임 내역 3년치를 조사했다. 다래의 부당한 전관예우를 적발한다는 명목을 내세웠다. 실질적인 조사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의 관심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사건번호·당사자·대리인·종국일·종국결과·승소율·패소율·담당 기술심리관 등의 자료를 뽑았다.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포함한 모든 로펌으로 조사 범위가 늘었다. 대통령 측근의 소송을 위해 사법부 인력이 동원된 것이다.

곽 전 비서관은 지난 8일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정확히 우 수석이 이 사건이 대통령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느낌이 들었습니다. 굉장히 부적절한 요청이었다는…. 후회스러운 마음입니다. 훌륭한 분들이 열심히 하는 로펌이었는데 경위야 어쨌든 간에 대통령 지위에 있는 분이 전관예우를 의심하는 것은 그 법인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인식했습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지시를 받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 박상언 판사가 특허법원에 수임 내역 정리를 부탁했다. 손천우 당시 특허법원 기획법관은 검찰 조사 때 “(박 판사로부터) 처음에 청와대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며 “당시 행정처에서 이상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지만 각급 법원의 판사를 상대로 청와대 요구 내용을 달라는 것은 사법권 독립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 판사는 전산정보관리국 심의관이었던 이은상 판사에게 보낸 e메일에 “BH(청와대)에서 터무니없는 통계를 원하기에 막았으나, 그래도 간단한 건 줘야 해서 하나 부탁하오. 최근 10년간 특허법원의 등록무효 사건 매년 접수 건수 부탁해”라고 썼다. 제도 개선까지 검토했다. 기술심리관 자리가 재판부가 앉는 법대 쪽에 함께 있어 불공정하다는 문제의식이 2015년 12월 법원행정처 문건에 등장한다. 문건에 인용된 사례는 박씨 사건이다.

임종헌 USB 속 파일 이름으로 사법농단 사건에 등장한 유해용 박근혜 비선의 진행 중이던 재판 문건 만들어 청와대 전달 혐의도

유 전 연구관은 임 전 차장 이동식저장장치(USB)에서 ‘2015후2204(유해용)’이라는 이름의 파일이 발견되면서 사법농단 사건에 등장했다. ‘사안 요약’이라는 제목의 4쪽짜리 파일에는 박씨 사건 주심이 권순일 대법관이고, 2016년 1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실 지적재산권조에 배당됐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현재 특허조사관이 기술검토 중이고, 2016년 3월 중순 보고연구관이 주심에게 보고할 예정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검찰은 임 전 차장과 유 전 연구관이 공모해 재판연구관에게 이 문건 작성을 지시하고, 청와대로 넘긴 게 위법하다고 봤다. 직권남용죄와 공무상 비밀누설죄가 적용되는 이 혐의는 ‘재판정보의 유출’이라는 측면에서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를 갖고 나간 혐의와 일맥상통한다.

■ 비밀 아니라는 재판정보

모두 ‘공무상 비밀누설죄’이지만 영장은 기각됐고, 자료는 파쇄했다 그리고 법정에 선 피고인은 자료 반출 관행을 눈감으라 한다

유 전 연구관은 ‘사안 요약’ 문건을 청와대에 주기로 임 전 차장과 공모한 적이 없고, 문건 내용도 사건 결론에 대한 게 아니라 기본적인 절차 진행정보에 불과하다면서 공무상 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에 사안 요약 문건이 전달됐다는 증거도 없다고 한다. 유 전 연구관 변호인은 “사안 요약 문건은 박태일 재판연구관이 스스로 알아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며 “유 전 연구관이 이런저런 사항을 포함하라, 포함하지 말라고 정해준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검찰은 ‘사건절차 진행정보 및 연구관 보고서 등의 보안에 관한 유의사항’을 알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 유의사항에는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 등의 정보는 재판 ‘합의’에 이르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 대법원 외부에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돼 있다. 유 전 연구관은 유의사항을 모른다고 했다. 검찰은 재판연구관 보고서 관리 시스템을 최초 실행할 때 유의사항에 서약하게 돼 있다며 유 전 연구관이 유의사항을 몰랐을 리 없다고 반박했다.

임 전 차장도 이 유의사항을 모른다고 했다. 임 전 차장은 재판연구관 경험이 없다. 그런데 유 전 연구관 측 신용석 변호사는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 사법행정 목적이라면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를 넘겨주는 게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정치인 사건의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를 법원행정처로 넘긴 다른 수석재판연구관 사례도 있다고 했다. 이것도 ‘관행’으로 포장될까.

“유의사항을 보면 재판 절차 개선 등 사법행정 목적상 필요한 경우 재판연구관 보고서를 제공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데, 대국회 업무 등을 위해 개별 사건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는 경우가 있었죠?”(신 변호사)

“네. 여러 가지 사법행정상의 목적을 위해 법원행정처 차장에게도 재판연구관 보고서 관리 시스템의 접근 권한이 부여돼 있습니다.”(임 전 차장)

단성한 부부장검사가 곧바로 따져 물었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도 볼 수 있었나요? 언제쯤 재판연구관실에서 주심 대법관에게 검토보고서를 올릴 것이라는 정보도 알려준 적이 있나요?” 임 전 차장은 이 질문에는 말을 흐렸다. “(심리가) 계속 중인 사건에 대해서도 볼 수 있었는지는 제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계속 중인 사건을 검색해본 적은 없습니다. 제 공소사실과 연관성이 있어서 진술을 거부합니다.”

법관이 아닌 사람의 경우엔 어떨까. 대법원에서 자신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되자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와 대법관의 심리의견서를 보고 싶다고 법원행정처장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낸 한 시민은 1심에서 기각 판결을 받았다. 유 전 연구관 주장과 반대로 이 자료들이 ‘합의’에 관한 것이라 비공개 정보라는 게 기각의 이유였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박형순 판사)는 “재판부의 합의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합의를 둘러싼 내·외부로부터의 부당한 공격을 막아 법관 개개인의 독립을 보장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양심과 증거에 따른 판단에 의한 사법권의 행사를 보장해 재판부가 다수로부터의 공격에 굴하지 않고 국민, 특히 소수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법원 직원이 이재록 목사 사건의 증인 실명과 신문 일정을 유출해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기소된 사건에서는 서울중앙지법 형사20단독 권희 판사가 유죄 판결을 내렸다. 권 판사는 “증인의 실명 및 증인신문 일정은 유출 전까지는 일반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며 “공개될 경우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법원 직원은 영장 발부로 구속된 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 전 연구관은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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