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 기준 애매한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 76만 업체 혼란

주희연 기자 2019. 7. 1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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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5인 이상 사업장 적용
고용부, 추가 예시자료 내일 발표

16일부터 직원이 5명 이상인 76만여 개 업체에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나 모욕 등 '갑질'을 회사에 신고하면 회사는 피해자가 요구하는 근무지 변경, 유급휴가 등을 허용해야 한다. 가해자는 징계해야 한다. 회사가 신고자나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줄 경우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는다. 10인 이상 업체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대응 절차와 예방 조치 등 규정을 만들어 '취업규칙'에 넣어야 한다.

하지만, '괴롭힘'에 대한 판정 기준이 모호한 데다 취업규칙 변경 등 시행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혼란이 예상된다. 취업규칙 변경 신고를 해야 하는 사업체가 30여만 곳에 달하지만, 상당수가 시행 전날인 15일까지 신고를 완료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이 신고를 마치지 못한 업체가 몇 곳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고용부는 지난 2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가이드라인 성격의 매뉴얼을 발표했지만, 50여 가지 사례에 불과해 다양한 상황에서 판정 기준으로 삼기에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데도 고용부는 시행 하루 뒤인 17일에야 추가적인 예시 자료를 공개할 예정이다. 권혁 부산대 교수는 "단편적인 사례 모음 성격인 정부 가이드라인이 오히려 분쟁을 부추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6개월간의 유예 기간을 끝내고 16일부터 시행되지만, 기업들은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문제는 이 법을 사규에 반영하는 취업규칙 변경에서부터 벌어지고 있다. 시행 전날인 15일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회사들이 속출했다. 500만원 이하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될 처지다.

인사·노무 담당자가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어떤 문구를 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 노무법인 노무사는 "최근 일주일 동안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취업규칙을 만들어달라'는 영세 업체들의 문의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약 20%는 아직 계획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직원 30명을 둔 서울의 부동산 관리 업체 A사 관계자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표준 취업규칙 양식을 가지고 괴롭힘 방지와 관련된 내용을 넣으려 했지만, 모르는 게 많아 아직 고용부에 신고하지 못했다"고 했다.

일부 기업에선 "노조에서 협조해주지 않아 못 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근로자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 취업규칙을 고치려면 근로자 과반의 의견이나 동의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부 노조가 '처우 개선을 해주지 않으면 취업규칙 개정에 동의해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기업들의 사정 때문에 당장 취업규칙에 반영되지 않더라도 한 달 정도 지연될 경우에는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했다.

한 기업 담당자는 "현장에선 벌써부터 법 위반 사례가 쏟아질 조짐이 보이고 있는데, 이런 혼란을 촉발한 정부는 오히려 안이하고 무감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가장 큰 쟁점은 "어느 선부터 괴롭힘에 해당하느냐"다. '괴롭힘'의 개념이 모호한 데다 구체적 물증이 없는 경우엔 판정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기업들이 궁금해하는 주요 사례 다섯 가지에 대해 고용부의 답변을 받았다.

―상습적으로 지각하는 후배의 한 달치 출근 시간을 따로 기록해 지적하는 경우.

"업무 효율을 해치는 직원에 대해 근태 관리를 한 것으로 인정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

―팀장이 단체 대화방에서 특정인에게 "똑바로 하라"면서 업무 실수를 공개 지적한다면.

"반복적이지 않고 일회성 주의라면 해당하지 않는다."

―같은 부서에서 한 사람만 뺀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운영하는 경우.

"업무와 연관된 관계에서 고의적으로 따돌려 대화를 나눈 것은 '왕따'에 해당해 직장 내 괴롭힘을 저지른 것이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후배가 특정 상사의 지시만 무시하고 반발할 경우.

"직장 내 괴롭힘은 업무 관계라면 후배든 상사든 모두 위반자가 될 수 있다. 후배의 행위가 반복적이거나, 다른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괴롭힘이 인정된다."

―보완이 필요한 부분 등 명확한 지시 없이 수차례 반복적으로 "다시 해오라"고 지시한다면.

"업무 지시를 단순히 반복한다고 해서 '적정 범위를 넘었다'고 보기 어렵다."

"예방 조치 어떻게 하나" 꼬리 무는 혼선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조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두고도 기업들이 혼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에 따르면 10인 이상 회사는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조치 사항을 필수적으로 기재해야 한다. 20인 규모의 급식 업체를 운영하는 B씨는 "예방 조치는 사실상 교육밖에 없는데, 직장 내 성희롱, 산업 안전 등등 지금도 법정 의무 교육이 넘치는 마당에 이것까지 추가해야 하는 거냐"고 했다. 직장 내 괴롭힘 예방 교육은 법정 의무 교육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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