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1965년 협정에 불법성 전제 '개인 손배'는 없었다

이혜리 기자 2019. 7. 1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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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청구권’ 주요 쟁점 체크

일 ‘최종 해결’ 근거인 청구권협정엔 ‘개인 손배 청구권’ 불포함…한·일 모두 인정해 온 부분 보수언론·한국당 주장하는 노무현 정부의 민관공동위 발표도 ‘국가 보상’이지 ‘배상’ 아냐 외교 문제니까 사법자제?…“순수하게 법리적 판단 문제, 사법자제하라는 쪽이 정파적 의견”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지난해 10월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한·일 경제충돌의 주요 원인이다. 일본 정부의 핵심 주장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반면 대법원은 개인 손해배상 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며 근거들을 제시했다. 현재 불거진 갈등의 상당 부분은 대법원 판결 취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2018년 대법원 판결과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나온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자료 등을 토대로 쟁점을 짚어봤다.

■ 1965년 청구권협정에 손해배상 청구권 포함됐나

한일청구권협정에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됐다는 일본 정부 주장의 근거는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협정 문구다. 미국 등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이 전후 배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1년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는 일본과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의 재산상 채권·채무 관계는 특별약정으로써 처리한다고 돼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청구권협정문과 부속서 어디에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고 봤다.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가해행위의 불법성 성립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불법성 언급이 없다면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었다. 한국 정부가 당시 발간한 한일회담백서를 보면 “대일 청구권은 승전국의 배상 청구권과 구별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인 당사국이 아니어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러한 한·일 간 청구권 문제에는 배상 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한국 정부가 협정 체결을 위한 한일회담 때 제시한 8개 항목에도 미수금과 보상금은 있어도,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없다. 대법원 판결 취지는 청구권협정은 일종의 ‘정치적 합의’로 3억달러를 받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달리 애초 한·일 정부와 법원은 일관되게 협정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입장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협정은 한국과 일본이 각자 국내법을 통해 상대방 국가에 대한 이의제기를 안 하기로 합의한 것에 불과하다”며 “일본은 1965년 한국인의 청구권을 일본 국내에서 소멸시키는 청구권 특별조치법을 만들었고 일본 법원도 청구권 소멸의 근거는 일본 국내법이지 협정이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김 교수는 “한국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에 제기할 상황은 (협정 당시) 상상을 못했던 것”이라고 했다.

■ 노무현 정부 민관공동위원회도 협정 포함 인정했나

조선일보 보도와 자유한국당 의원 등의 주장을 통해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가 협정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됐다고 발표했다는 내용이 전파됐다. 당시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4쪽짜리 보도자료에는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한·일 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해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 간 무상자금 산정에 반영됐다고 봐야 함”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강제징용 피해자 대리인단은 “국가가 국민에게 가한 재산상의 손실을 갚아주는 ‘보상’과 남의 권리를 불법으로 침해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손해를 물어주는 ‘배상’은 의미가 다르다”며 “민관공동위 발표는 배상 문제는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보도자료 1쪽에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음”이라고 기재하고 일본군 위안부·사할린 동포·원폭 피해자 문제만을 사례로 들었다며 강제징용은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김세은 변호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이라고 표현돼 있고, 3쪽에서 정부가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외교적 대응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나가겠다며 해남도 학살사건도 언급한 것을 보면 민관공동위원회가 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됐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보도자료에는 “한일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라며 청구권이 협정 대상이 아니었다는 내용도 있다.

■ 법원은 외교 문제에 대해 ‘사법자제’ 해야 하나

일각에서는 법원이 정치·외교 문제에 대해 사법적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이른바 ‘사법자제론’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내놓은 이들은 미국 등에서는 조약을 해석할 때 정부 입장을 고려하는 등 법원이 일방적으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법조계 의견은 다르다. 한 법학 교수는 “모든 것을 법원이 판단하고 사법이 지나치게 정략화되는 데 대한 우려는 있을 수 있지만 강제징용 사건은 사법자제론과는 관련이 별로 없다”며 “강제징용 사건은 국가가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느냐가 쟁점이라 순수하게 법리적으로 판단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사법자제설을 이야기하는 게 오히려 정파적”이라고 했다.

미국은 참고인 의견제출 제도(법정조언자 제도)가 있기 때문에 정부가 조약 해석에 관한 의견을 법원에 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 제도가 없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강제징용 사건에서 외교부 요청이 계기가 돼 참고인 의견제출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사법자제론을 포함해 강제징용 사건의 판결 시나리오를 검토하게 시킨 게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의 직권남용 혐의다. 그런 임 전 차장도 자신의 재판에서 양승태 대법원이 무조건적인 사법자제론을 검토하진 않았다고 주장한다. 임 전 차장 측은 지난 4월9일 재판에서 “(법원행정처 문건에서는) 일본 기업들의 진지한 피해 회복 노력이 있을 경우 사법자제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라며 “진지한 논의에 기반한 실질적 배상이 전제돼야 한다고 쓰고 있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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