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빠는 북송됐지만 아빠 글은 탈북시켰죠"

박돈규 기자 입력 2019.07.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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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돈규기자의 2사만루] 아빠의 수기 '노예공화국..' 19년 만에 펴낸 한봉희씨

1급 설계원 한원채(1943~2000)씨는 1998년 8월 공화국을 버렸다. 배급이 끊겨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한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아내와 세 자녀까지 한씨 가족은 함경북도 길주 고향집 출입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맨몸으로 떠났다.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을 떠돌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공안에게 붙잡혀 북송됐다가 재탈북하기를 두 차례, 그는 모진 고문과 수감 생활을 중심으로 북한에서 겪은 일을 원고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탈출해 실상을 알리자. 이 글이 (북한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죽더라도 가족 중 한 명은 꼭 살아서 한국으로 가야 한다. 단어 하나도 바꾸지 말고 책으로 내보내라."

일주일 만에 수감기를 탈고하고 둘째 딸 봉희씨에게 했다는 말이다. 압수당할까 봐 복사본을 만들어 두 곳에 맡겼다. 2000년 9월 한씨 부부는 옌지(延吉)에서 다롄(大連)으로 이동한 직후 중국 공안에게 체포돼 강제로 송환당하고 말았다. 따로 움직인 세 남매는 무사했다. 어느 일본 출판사가 한씨 원고를 읽고 선인세(先印稅·계약금으로 미리 주는 인세)를 건넸다. 5000달러(약 589만원). 피로 쓴 수난기가 자식들에게 한국 가는 경비, 안전한 미래를 선물한 셈이다.

한씨는 고문으로 사흘 만에 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몸은 북송됐지만 글은 탈북했다. 서울 중구 '100년 한의원' 한봉희(43) 원장은 지난달 '노예 공화국 북조선 탈출'(행복에너지 刊)을 펴내 19년 전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켰다. 감회를 묻자 "밝히기 두려워 내 자식들에게도 숨긴 이야기였다"며 "평생 응어리로 맺혀 있던 아버지의 한을 오늘에야 풀어드린 것"이라고 했다.

한의사 한봉희씨는 탈북 후 중국에서 도피 중일 때 부친과 한 약속을 19년 만에 지켰다. 아버지의 북한 감방 생활기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을 지난달 출간했다. 한씨는 “붙잡혀 북송된 부모의 생사를 몰랐고 신분이 노출될까 봐 두려웠다”며 “이제야 무거운 짐을 덜어낸 것 같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자유를 찾아 두만강을 건너다

북한에서는 인텔리에 속했다. 탈북할 때까지 한원채씨는 함북 길주 펄프 공장에서 35년간 기계 설계사로 일했다. 아내는 철도국병원 내과 의사. 두 딸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아들은 고등학생이었다. 하지만 6·25전쟁 때 부친이 남으로 간 '월남자 가족'이라는 배경이 그들을 괴롭혔다.

―왜 탈북을 결심했나요.

"아버지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어렵더라도 우리가 참아야 한다'고 말씀하곤 하셨어요. 사상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분처럼 보였지요. 출신 성분 때문에 감시받는 바람에 더 그렇게 행동하신 거예요. 어머니는 달랐어요. '우리는 김일성·김정일의 노예다. 군대 가면 총알받이밖에 안 된다'며 말리셨지요. 저는 대학에 가서야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김정일이 '사회주의는 과학이다'(1994)라는 논문을 쓴 뒤 연례 행사처럼 문답식이 열렸는데 1997년 2월에는 황장엽 선생이 망명하면서 갑자기 취소됐어요."

―문답식이라뇨?

"누가 잘 외웠는지 발표하는 대회입니다. 제 번호가 뽑히지 않기만 바라면서 밤새워 논문을 암기했어요. 사회주의의 무상 치료와 11년제 의무교육, 등록금 없는 대학과 식량 배급, '배고프지 않고 다 같이 잘산다'는 체제 선전, 그 거짓말을요. 문답식이 취소돼 속으로 만세를 불렀지요."

―당시 사정은 어땠나요.

"몇 년 사이에 꽃제비가 부쩍 늘었고 굶어 죽은 시체도 넘쳐났지요. 그런 마당에 사회주의의 우월성이라니. '과도기라서 그렇다'곤 하는데 상황이 점점 더 나빠졌어요. 이곳엔 희망이 없다는 회의감에 젖었지요. 아버지가 '짓밟혀 사느니 자유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자'고 했습니다."

―부친처럼 과학(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아버지는 셈에 밝았어요. 도피 생활 할 때 아버지가 북한에서 받은 월급을 다 따져보곤 '1년치가 7달러밖에 안 된다'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길주에서 하루에 관(棺)을 얼마나 짜는지도 알고 계셨는데, 북한 전체 인구로 환산하면 고난의 행군(1995~1999년) 때 300만명이 죽었다는 계산이 나왔어요. 설마설마했지만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당시 북한 아사자가 300만명이라는 뉴스를 듣고 '아버지가 틀리지 않았구나' 했지요. 그 절반이라 해도 기막힌 노릇 아닙니까."

―두만강 건넌 날을 기억하나요.

"나머지 가족은 1998년 8월에 빠져나왔고 저와 어머니는 그해 4월에 먼저 탈북했습니다. 함북 무산에서 두만강에 들어간 게 밤 11시쯤이었어요. 얼음이 녹아서 차가운 강물이 가슴 높이까지 차올랐지요. 돌아보니 광산에서 철커덩 철커덩 소리가 들려왔어요. 시커먼 굴 속에서 버럭(광물이 섞이지 않은 잡돌)이 컨베이어벨트로 실려 나와 버려지고 있었어요. 내가 두만강을 건너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요. 집도 다 팔아먹고 먹을 게 없어 길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은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알 수 없었지만 저곳은 지옥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건너편 중국은 첫인상이 어땠나요.

"날이 밝아 어느 동네에 들어섰는데 창고에 쌓여 있는 옥수수부터 보였어요. 무엇이냐고 물으니 사료래요, 짐승 사료. '아니, 저 식량이 사료냐?' 다시 물었지요. '쌀밥만 먹지 옥수수는 안 먹는다'고 하더군요. 북한은 저것도 없어 죽는 판인데.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2000년 6월 중국 옌지(延吉)에서 촬영된 한봉희씨 가족사진. 언니와 남동생이 다롄(大連)으로 먼저 떠나기 전에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사진을 찍어 두자”고 해 사진관에 갔다. 오른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버지(한원채), 남동생, 어머니, 언니, 한봉희씨. /한봉희씨 제공

일생을 무의미하게 빼앗겼다는 분노

신분이 불안정했지만 중국에선 노동의 대가를 받았다.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늘 시달렸다. 탈북하고 1년 동안 KBS에 귀순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베이징 한국 대사관에 망명 요청 전화를 걸었지만 허사였다.

―대사관에서는 뭐라 하던가요.

“햇볕정책을 펴던 때라서인지 ‘탈북자 대책은 나온 게 아직 없다’고만 했지요. 북한 보위부가 현상금을 걸고 추적 중이라 우리 가족은 절박했어요. 숨겨준 사람마저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는데.

“그래야 더 안전하니까요. 누구 한 명이라도 반드시 한국 땅을 밟자고 했어요.”

―1999년 8월에 부친, 남동생과 함께 공안에게 붙잡혔다고 적혀 있더군요.

“인민폐 1만위안을 주면 세 식구 다 내보내 준다고 해서 줬는데 ‘남자들은 고생 좀 하다 다시 나올 수 있다’며 저만 풀어줬지요. 아버지와 남동생은 북한 국경 수비대에 넘겼고요. 남동생은 바보 행세를 하다 1주일 만에 탈옥했고, ‘북송되면 무조건 단식해 죽을 것’이라고 하신 아버지는 3개월 만에 도망쳐 돌아오셨지요.”

―구타와 고문 속에서도 부친은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원고를 쓸 때 모습은 어땠나요.

“수기에는 진실만 담았습니다. 진지하셨어요. 저희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중국에 와서 처음 들었어요. 체제가 싫어서 나왔을 뿐인데 범죄자로 몰리고 학대받으면서 투지가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온갖 불의와 인권침해, 노예처럼 일생을 무의미하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분노 때문에 꺾을 수 없는 사명감이 느껴졌어요.”

―수기 때문에 더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데.

“알고 계셨어요. ‘한국에 가서 써도 되지 않느냐’ 말씀드렸더니 ‘잊히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 자유를 찾아가는 길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불행하고 폐쇄된 지옥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69쪽에 ‘당 일꾼들은 당당하게 해먹고, 보위 일꾼들은 보이지 않게 해먹고, 안전원들은 안전하게 해먹고, 간부들은 간단하게 해먹는다. 보고만 있을 수 없기에 로동자들은 로골적으로 해먹는다’는 풍자가 나옵니다.

“북한에서는 누구나 아는 노래예요. 노동자들도 먹고살아야 하니 노골적으로 훔쳐요. 잡히면 죽는 사람도 노동자지요. 공화국 식량을 포기하고 산에 화전을 일굽니다. 풋콩 지키느라 밤에도 경비를 서고요.”

―인민군과 보위부 간부들이 부친을 호송하며 ‘큰 고기’에 빗댄 대목은 씁쓸했어요.
“남의 불행을 이용해 현상금과 훈장을 챙기려는 악다구니죠. 시시각각 위험이 닥쳐왔어요. 망명 직전 부모님이 잡힌 것도 탈북자를 돕는 교회에 북한과 내통하는 밀고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행장에 가짜 미그기들이 놓인 대목에 대해 묻자) 아버지가 길주 평륙리 비행장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적을 속일 목적으로 모형 미그기를 설계하는 일을 했지요. 북한에서는 가짜가 판을 쳐요. 정치도 가짜, 선전도 가짜, 역사도 가짜, 무력도 가짜….”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좁은 창살 안에서 처지가 같은 죄수끼리 하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슬프게도 북한에서는 그곳이 가장 자유로운 공간이에요. 나머지 모든 자유는 정권이 빼앗았지요. 사람이 자유가 없으면 노예예요. 살아 있어도 죽은 거예요.”



한의사 한봉희씨가 서울 중구 ‘100년 한의원’에서 진맥을 하고 있다. 환자 중 30%가 탈북자라고 한다. 한씨는 “아버지 생신에 제사를 함께 지내며 책을 상에 올릴 것”이라며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들이 가장 부럽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북한을 낭만적으로 보지 말아야”

2001년 8월 그녀를 태운 비행기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착륙했다. 캄보디아에서 태국을 거쳐 날아오는 내내, 어쩌면 그전부터 ‘한국 땅을 밟으면 마음껏 소리 질러야지’ 생각했다고 한다. 막상 도착하니 달랐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단다.

―고대한 순간인데 왜 그랬을까요.

“숨어 지내며 억눌려 있을 땐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감정이 북받치며) 눈물만 나오지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어요. 너무 벅차서, 부모님께 미안해서.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탈북자들도 그랬대요.”

―후기에 ‘살아 있는 게 죄스러워 몹쓸 생각도 했다’고 썼는데.

“부모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울먹인다) 사람들이 ‘가슴 아프다’고 말하곤 하지만 실제 체감은 못 하잖아요. 저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어요. 상지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진 우울증이 심했습니다. 나까지 잘못되면 언니와 동생은 어떻게 살까, 그 생각이 저를 막았어요. 아이를 가지며 치유됐고요.”

―자녀들은 엄마·아빠가 탈북자라는 걸 아나요.

“둘째 딸은 저희 부부가 TV 토크쇼 ‘모란봉 클럽’에 나간 걸 봤어요. ‘엄마·아빠 북한 사람이었어? 대단하다!’고 했지요. 큰딸은 아는지 모르는지, 말한 적은 없어요.”

―19년이나 지나서야 아버지 수기를 출간한 까닭은.

“아버지는 일본 출판사에 ‘자식들이 한국으로 무사히 들어온 다음에 출간한다’는 조건을 달았어요. 부모님 생사를 몰랐고 신분이 노출되는 것도 싫었지요. 대학 들어가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바빴고요. 일본에서 책이 나온 걸 작년에야 알았어요. 늦었지만 우리말로 출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혹시 최근에 꿈에서 부친을 뵈었나요?

“여전히 쫓기고 있는 악몽을 종종 꿔요. 꿈속에서 본 부모님은 그동안 늘 그늘지고 굳은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부모님과 가족이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꿈을 꿨는데 처음으로 웃는 모습이었어요. 무거운 짐을 덜어낸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 탈북자를 바라보는 편견이 있습니다만.

“탈북자는 처음에 국가의 도움을 받지만 안주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능력 있으면 자립할 수 있고요. 남한 사람들이 꺼리는 막노동도 탈북자는 합니다. 연세가 많거나 아프거나 경제활동을 하기 어려운 사람은 국가 보조를 받겠지만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성공 비결을 물으면 어떻게 답하나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공부에 매달렸어요. 한의대 졸업하고 얻은 면허증 한 장만 보고 은행에서 1억원을 대출해줬어요. 그 자금으로 개원할 수 있었지요. 지금도 빚이 있지만 갚으면서 가는 거예요. 1년 먼저 들어온 남편이나 저나 빈손으로 출발했어요.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으니 감사한 나라죠.”

―탈북해 지금 중국에서 불안하게 숨어 지내는 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통화가 된다면 ‘대한민국은 자유와 인권, 번영이 넘치는 곳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되도록 빨리 오라’고 말할 거예요. 경제적 지원을 포함해 최선을 다해 돕고 싶어요.”

―남북 대화를 하면서 북한 인권은 뒤로 밀려났습니다.

“애들 친구 엄마도 ‘북한에 돈 좀 퍼주면 어때. 미사일 안 쏘면 되지’ 하며 문재인을 찍으라고 했어요. 한국에 돈이 그렇게 많아요? 왜 이렇게 끌려다니는지. 저는 개성공단 폐쇄 잘했다고 생각해요. 퍼 줘 봤자 북한 주민들 생활이 개선될 리 없어요.”

―지난달 30일 판문점에서 한·미·북 정상이 만났는데.

“쇼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얻은 건 뭔가요? 지지율 올린 것밖에 없어요. 북한을 너무 낭만적으로만 보니 큰일이에요. 중국과 가까워지고 미국을 등지는 건 김정은이 기뻐할 일이잖아요.”

이 한의사에게 한국 사회를 몸에 빗대면 부실한 부분이 무엇인지 물었다. “요즘 무너지고 있는 국방과 안보가 걱정”이라며 “복지가 나라를 좀먹고 있는데 공짜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태도가 평등을 좇다 추락한 북한 사회를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고 했다. “사람 몸으로 치면 넘치는 자유와 풍요가 비만을 불렀고 심정지 직전이라 심폐 소생술이 필요합니다. 입국 후 요즘처럼 위기감을 느낀 적이 없어요. 위정자들이 북한을 똑바로 보고 정책을 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한의원으로 가는데 한씨가 운전대를 잡았다. 오디오 재생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최진희 ‘슬픈 고백’. 19년 동안 숨겨온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놓은 딸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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