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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일 관계에 폭탄을 던졌나

입력 2019.07.21. 10:58

[한겨레21] 보수언론이 분노 쏟아붓는 강제징용 피해 배상 판결 대법관들…
판결 이후 협상 기회 있었는데

2019년 7월15일 <조선일보> 갈무리

최근 악화한 한-일 관계를 문재인 정부 탓으로 몰아가는 보수언론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존재가 있다. 일본 전범기업에 강제징용 피해 배상 책임을 물린 대법관들이다. 대법원은 2012년 5월24일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 판결과,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 재상고심) 판결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개인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이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양국 간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박정희 정권 이래 보수정권에서 유지된 일본 과거사 관련 정책 기조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일본이 협정 직후 권리 소멸 법률 만든 이유

한일청구권협정을 박정희 정권의 업적으로 치켜세우는 보수 진영에 김능환 전 대법관이 주도한 2012년 대법원 판결은 날벼락이었다.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차관 2억달러’를 받아 경제를 발전시킨 박 전 대통령은 보수의 우상이다. 이 판결은 우상의 업적을 여지없이 깎아내렸다. 더욱이 보수의 아성이었던 ‘양승태 대법원’에서 이 판결이 나와 충격이 더 컸다. 2018년 ‘김명수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은 이 판결을 재확인한 것이다. “징용 배상 판결이 ‘뇌관’이었다… 최근 한-일 관계 갈등은 모두 법원발(發)”. <조선일보>의 7월15일치 이 기사 제목은 사법부에 대한 보수 진영의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이 기사에서 ‘한일청구권협정 최고 전문가’로 소개된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김능환 전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했지만, 한-일 관계에 대형 폭탄을 투척한 셈”이라고 비꼬았다. “사고는 대법원이 치고 고통은 국민이 속절없이 당하는 형국이다.”(<중앙일보> 7월15일치 ‘전영기의 시시각각’) “강제징용 판결이 불을 질렀다.”(<동아일보> 7월15일치 ‘박제균 칼럼’) 보수 논객들은 사법부를 융단폭격하듯 때리고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한 대법관들은 사고를 친 걸까.

“이번 대법원 판결을 마치 폭거인 양 비난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청구권협정에서 포기한 것은 외교보호권이고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이 판결의 논리를 지지하는 논조도 우리나라 지식인 중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고, 원래 일본 정부도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유지해온 터다. 국가 간 조약이나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일방적으로 소멸시키고 재판상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인지, 기본으로 돌아가 생각해볼 일이다.”

일본 월간 시사종합지 <세카이> 2월호에 실린 니무라 마사토 전 도쿄고등재판소 판사의 기고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니무라 전 판사는 2000년 12월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열린 ‘하나오카 사건’ 재판장을 맡아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일본 전범기업의 화해(하나오카 화해, 상자기사 참조)를 이끌었다. 그가 언급한 대로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지지를 받았다. 2018년 우리나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직후 일본 변호사 90여 명은 이 판결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는데, 20여 일 만에 찬성하는 변호사가 200여 명으로 늘었다.

2019년 7월8일 <중앙일보> 갈무리

“일본 지배 성격 합의 안 된 시기의 협정”

니무라 전 판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에 관여한 대법관들이 시야가 넓은 우수한 법률 실무가인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대법관들이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에 대해 깊은 배려와 경의를 보이고, 어떠한 세력에도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해서 이 결론에 이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썼다. 국내 보수 논객들이 대법관들을 ‘사고뭉치’로 조롱하는 것과 전혀 다른 논조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은 논리정연하다. 김능환 전 대법관의 판결문은 철저하게 ‘팩트’(사실)에 기반해 법리를 전개했다. 그는 한일청구권협정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에 근거해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개인청구권이 당시 협정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기 때문에 한-일 양국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 성격에 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국가권력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피해 배상이 이뤄졌다고 보는 게 법리에 맞느냐는 일침이다.

김 전 대법관은 “국가가 조약을 체결해 국가와는 별개의 ‘법 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와 상충된다”고 일갈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모순된 태도도 꼬집었다. “일본이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국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법률을 만든 것은, 청구권협정만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일본 국회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직후 한국의 과거사 피해자가 일본에서 소송으로 피해 배상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 제144호’를 만들었다. 일본 법원에서 진행했던 과거사 소송을 대리한 일본 변호사들은 이 법을 한일청구권협정에 개인청구권이 포함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주요 근거로 제시했다.

2019년 7월15일 <동아일보> 갈무리

국민 기본권보다 국가 간 약속 더 중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박정희 정권의 유산’이 몸에 밴 외교 관료들을 패닉 상태로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본에 대한 모든 청구권이 완전히 해결됐다’는 시각이 일종의 신념으로 내재됐다. 국제법 전공자들도 비슷했다. 2013년 5월 서울대에서 열린 한-일 관계 관련 심포지엄에 참석한 국제법 전공 학자들은 대부분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 기본권보다 국가 간 약속을 더 중시하는 시각이었다.

외교 관료들은 ‘배상 판결이 최종 확정될 경우 한-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하고 심각한 외교 문제가 생길 것’이라며 막 임기를 시작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실제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가 민사소송이라고 방관하면 곤란하다”며 정부가 개입할 것을 요구했다. 삼권분립을 무시한 후안무치한 내정간섭이었지만, 외교 관료들은 항의조차 제대로 안 했다. 오히려 2013년 11월15일 국무총리 주재 현안회의에서 외교 관료들은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을 거쳐 다시 대법원에 올라간 ‘일본 전범기업의 강제징용 피해 배상 책임 사건’의 재상고심을 최대한 늦춰야 한다고 정홍원 국무총리에게 건의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기춘 비서실장을 통해 ‘양승태 사법부’에 전달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부 수뇌부는 청와대의 지시에 순응했다. 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삼권분립은 안중에도 없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2013년 9월 박찬익 당시 심의관에게 문건 작성을 지시하면서 “외교부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 대법원 결론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된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가면 우리가 질 거라고 한다” “심리불속행(재상고 기각)으로 바로 끝내기는 어려운 사건 아니겠느냐” 등의 말을 전했다. 그는 “외교부에 대한 절차적 배려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도 했다.

그러나 외교 관료들은 양승태 사법부가 ‘절차적 배려’를 해 참고인 서면 의견서 제출제도를 만들어줬는데도 정작 의견서 제출은 머뭇거렸다. ‘일본 전범기업 편을 들고 있다’는 여론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2015년 12월28일 청와대가 주도한 ‘한·일 위안부 합의’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자 외교부는 더욱 몸을 사렸다. 외교부는 박근혜 청와대의 질책을 받고서야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판결 직후 외교 당국이 나섰다면”

‘박정희 유산’이 몸에 밴 외교 관료들은 지금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존중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말에 그칠 뿐 행동은 없다.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온 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관련 단체와 법조인들이 대법원 판결 취지에 맞게 일본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했지만 외교부는 묵묵부답이었다. 강제징용 소송을 대리한 최봉태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인권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한겨레21>에 “대법원 판결 직후 외교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본 정부와 협상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사태가 지금처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오카 화해’란

중국인 노역자 학대의 본질은 인권침해

1945년 6월 일본 아키타현 하나오카광산 일대에서 벌어진 중국인 강제노역자 학대 사건과 관련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 도쿄고등재판소가 피해자 쪽과 일본 기업의 화해를 성사시킨 사건이다. 일본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화하자 중국에서도 강제징용을 했다. 일본 가지마건설은 당시 하나오카광산 일대에서 수로 변경과 댐 건설 공사에 중국인 986명을 동원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강제노동에 저항하는 중국인들을 탄압했는데 100여 명이 처형당하거나 고문으로 숨졌다.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하나오카광산 중국인 노동자의 42%인 420명이 희생됐다.

당시 피해를 당한 중국인 11명은 1995년 가지마건설을 상대로 일본에서 소송을 냈다. 도쿄고등재판소는 가지마건설에 피해자들과 화해하라고 계속 권유했다. 일본 정부는 1972년 중국 정부가 일본에 전쟁 배상 청구를 포기했다는 입장이었고, 1심 재판부는 시효를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한 상태였다. 하지만 도쿄고등재판소는 이 사건의 본질이 인권침해라는 점에 주목해서 기업에 화해를 끈질기게 권유했다. 결국 가지마건설이 2000년 중국 홍십자회(적십자)에 5억엔을 신탁금으로 내 희생자 위령비 건립 등에 쓴다는 내용의 화해가 이뤄졌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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