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9999999% 불화수소 특허 받고도 8년을 묵힌 한국

장정훈 2019. 7. 24.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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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 화학·플랜트업체 C&B산업
8년전 일본제보다 초고순도 개발
공장 짓는데 50억, 중기 감당 못해
"지역 주민 반대, 인허가도 어려워"
양자보안을 이용한 반도체 생산시연 과정. [중앙포토]
23일 오전 9시 충남 금산의 화학·플랜트업체 C&B산업의 회의실. 이 회사 임원진은 이날 6년 전 취득한 초고순도 불화수소의 특허 출원서를 꺼내놓고 다시 머리를 맞댔다. 독자 개발한 초고순도 불화수소 정제 기술의 자체 상용화를 놓고 2시간여의 난상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6년 전과 마찬가지로 ‘불가’였다. 이 회사 김 모(56) 대표는 회의 직후 “우리 기술은 자신 있지만 만만치 않은 비용과 높은 진입장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초고순도 불화수소를 6년 전 개발했지만, 매출 100억원 남짓한 중소기업으로서 이번에도 자체 상용화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회사가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초고순도 불화수소 특허를 출원한 것은 2011년, 2013년에 심사를 통과해 등록했다. 불화수소에 있는 수십 가지의 불순물 비중을 10억분의 1까지 걸러내는 기술이 특허의 핵심이다. 불화수소에 소량의 과산화수소를 넣은 뒤 초음파를 쏴 걸러내기 가장 어려운 불순물 중 하나인 비소가 많이 접착되도록 해 순도를 높인 기술이다. 특허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이 수출을 규제하고 있는 순도 99.999%(파이브 나인)보다 훨씬 높은 99.99999999%(텐 나인)의 불화수소를 7번의 실험을 통해 정제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업체 측은 주장했다.

C&B 산업의 불화수소 특허 출원 내용.
묵혀뒀던 특허를 다시 꺼내 든 건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로 고순도 불화수소가 주목받으면서 상업화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 대표는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 같은 조그만 중소기업이 직접 상용화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비용과 인력 외에도 불화수소 공장을 지을 경우 부닥칠 지역 주민의 반대와, 열 군데 이상을 쫓아다니며 비슷한 내용의 인허가를 받는 것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김 대표의 고민은 국내 중소 반도체 소재·장비업체가 한결같이 맞닥뜨리고 있는 장벽이다. 소재나 장비 업체의 경우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해도 상업화까지는 크고 작은 산을 넘어야 한다. 우선 시제품 생산라인과 각종 분석 장비를 확보해 1차 테스트, 전문 기관의 2차 테스트,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양산 테스트 등을 거쳐야 한다. 이 회사의 경우도 10억원 정도 하는 금속분석 장비를 사고, 시제품(파일럿)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데만 줄잡아 40억~50억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정부는 이런 소재·장비 업체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국산화율을 높이기 위해 한국 나노기술원이나 나노융합기술원, 나노종합기술원 등을 운영 중이다. 10여 년 전 설립된 이 기관들은 200㎜ 웨이퍼로 40nm(나노미터)급의 반도체 생산 장비나 소재를 테스트할 수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현재 300㎜ 웨이퍼를 사용해 7~14nm급의 반도체를 생산한다. 이종희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협회 전무는 “반도체 업계는 하루가 멀다하고 초미세공정(스케일링 다운)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중소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테스트 장비는 10년, 15년 전 수준에 정체돼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가 지난해 국내 소재·장비업체 66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최종 업체가 요구하는 300㎜에 대응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곳은 4곳에 불과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소재나 장비를 개발해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양산 테스트를 받으려면 짐을 싸 들고 벨기에나 미국 등을 오가며 인증서를 받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염근영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반도체 비중이 큰 만큼 국내 소재·장비 업체를 육성해야 한다”며 “특히 반도체 소재 장비의 국산화율을 높이려면 300㎜ 기반의 전후 공정과 분석 설비를 갖춘 1차 테스트 베드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장정훈 기자 cc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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