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시시각각] 다시는 기업인으로 태어나지 않겠다

이정재 2019. 7. 2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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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극일, 말로는 잘 싸우라면서
"뺨 맞은 게 잘못" 대기업 원죄 탓
밖의 창보다 안의 비수가 무서워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경제 극일’ 전의 한국 쪽 선봉은 대기업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정부·여당의 주문이 부쩍 많아졌다. 대통령은 22일 “우리는 가전·반도체·전자 등 일본의 절대 우위를 극복·추월해왔다”고 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대기업일 것이다. 적폐→우리라는 동지적 관계로 신분이 수직상승한 셈이다. 바람직한 변화지만, 효과는 글쎄다. 기업인들의 속내를 물었다. 첫마디가 “절대 이름 나가면 안 된다”는 신신당부였다.

대기업 임원 A·B·C·D 말을 종합하면 ‘사면초가, 사고무친, 동네북’ 이었다. A는 “세 마리 원숭이 인형 알죠? 눈 가리고, 입 막고, 귀 막은 거. 딱 그렇게 삽니다.”라며 입을 굳게 닫았다. B는 지난달 중국 국무원 국가개발개혁위원회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 임원을 각각 불러 “미국에 협조하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 얘기를 전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와 델 등이 자국 정부에 이런 사실을 알리면서 현지 언론에 보도됐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외신을 보고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B는 “중국 정부에 닦달 당하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라며 “웬만한 내용은 우리 대사관에 시시콜콜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사드 사태 이후 우리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며 “중국에 덜 맞으려면 입 다무는 게 답”이라고 했다.

중국이 양아치라면 미국은 마피아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방한 중 미국에 투자한 기업인 20여 명을 불렀다. 사드 사태의 희생양이었던 신동빈 롯데 회장을 특히 “베스트 프렌드”라며 몇 번이나 추켜세웠다. 당시 참석했던 C는 “중국 말고 미국 편에 서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들렸다”고 했다. 그는 “오전 10시 간담회인데 8시 반까지 오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30분쯤 늦어 기업인들은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외교를 잘해야 기업이 시달리지 않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중국이 양아치, 미국이 마피아라면 일본은 승냥이다. 선전포고는 없다. 기습이다. 대신 치밀하게 준비한다. 치명적 급소를 문다. 100여 년 전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그랬고, 진주만 공습이 그랬다. 당시 일본엔 ‘승리의 기억’이다. 어느 나라든 승전의 역사를 실패보다 깊고 생생하게 각인한다. 역사를 아는 리더라면 일본의 경제 침공이, 기습·급소를 노릴 것으로 보고 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우왕좌왕, 기업 탓만 했다. 산업부는 공격당한 대기업 임원을 불러 “왜 (일본이 공격할 걸) 몰랐냐”며 다그쳤다. D는 “몇몇 대기업은 올 초부터 일본의 공격을 예상했다. 예상 시나리오와 단계별 대책도 만들었다. 하지만 정부와 상의하는 건 엄두도 못 냈다. 이 정부엔 대기업 얘기를 들어줄 창구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래놓고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정부·여당은 연일 대기업 탓을 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일본 소재·부품기업을 1위로 올리는 역할을 했다(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기업이 안 사주는 게 문제(박영선 중기부장관)”라며 대기업의 ‘원죄’를 질타했다. 급기야 어제는 대통령마저 “국내에 능력이 있는데도 일본의 협력에 안주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대통령의 격려도 말뿐 아니냐며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이 진짜 바라는 건 그런 구두선이 아니다. 최저임금 과속 인상, 52시간제 졸속 시행, 검찰 수사의 일상화, 법인세 인상, 날마다 늘어나는 규제…. 반기업 친노조 정책의 폐기다. 그게 어렵다면 기·승·전·대기업 탓만이라도 삼가달라는 것이다. D는 “이번 사태는 결자해지 차원에서 정부가 해결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입 밖에 낼 수 없다는 게 진짜 문제”라고 했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자포자기에 빠진 회사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지금 시간 싸움을 하고 있다. 일본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게 빠를지, 적폐로 청산당하는 게 빠를지를 놓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는 한국의 기업인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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