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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마한 심장부의 생뚱맞은 백제고분 주인공은 성왕이 '담로'에 파견한 왕족?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2019. 07. 25. 09:16 수정 2019. 07. 2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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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나주 송제리고분 돌방에서 수습한 은제관식과 하단 고정 못. 6세기 전반 백제 중앙정부가 하사한 복식(옷과 장식)인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지배층의 무덤인가.’

3~6세기 전반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가 ‘옹관 무덤’이다.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올린 뒤 그 속에 여러 개의 옹관(독널)을 묻은 묘제를 일컫는다. 옹관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마한의 문화권임을 상징하는 묘제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대형옹관의 핵심분포권인 반남고분군 인근에 옹관과는 어울리지 못한 고분이 버티고 있다.

돌방 평면과 유물 출토 상황. 도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 최상위급 무덤에서 나오는 최상급의 유물이 세트로 출토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전혀 어울리지못한 고분

영산강 지류인 금천과 만나는 전남 나주 세지면 송제리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이른바 송제리 고분이다. 예부터 ‘동산’이니 ‘고려장’이니 하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1987년 도굴을 당한 채로 발견됐다. 하지만 1999년 실측조사로 무덤의 형태를 살펴보니 백제식 돌방무덤(석실분)이었다. 천장은 궁륭형(활이나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태)이었다. 이것은 마한의 핵심지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백제식 무덤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만약 마한인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반남고분군의 영역 내에 무덤을 조성해야 한다. 그런데 송제리 고분은 마한인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도 외톨이처럼 따로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에서 출토된 은제 관식, 은제 허리띠 장식, 은피 관못, 청동제 잔 등. 청동제 잔과 은장도 등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똑같을 정도로 수준이 뛰어났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학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형적인 백제고분이 ‘마한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왜 어울리지 못한 모습으로 조성됐을까. 무덤은 5세기 것인가, 6세기 것인가. 백제가 직접 파견한 관리의 무덤인가. 아니면 백제 중앙의 간접지배를 명받은 토착 마한 수장의 무덤인가. 이 고분의 축조배경과 시기, 성격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돌방 출토 은제 허리띠 장식(교구, 허리띠 끝장식) 앞뒷면이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 왕릉급 무덤이 왜 영산강 유역에?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1월부터 고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이미 무자비한 도굴을 당한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조사해본 결과 놀랄만한 성과를 얻어냈다. 지름 20m, 높이 4.5m의 돌방무덤에서 은제관식(은으로 제작한 관 장식)과 은제 허리띠장식, 은제 관못, 관고리, 청동제 잔, 호박 옥 등과 토기편 200여점이 쏟아져 나왔다.

전용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25일 “무덤의 주인공이 6세기 전반에 걸쳐 백제 중앙의 복식(옷과 장신구)을 받았던 증거”라고 밝혔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유물의 구성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은제품의 관식과 허리띠 장식 등 최고급 백제유물이 세트로 현현했습니다. 무엇보다 허리 부근에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똑같은 은장도(손잡이 끝부분과 칼집장식 출토)가 보였습니다. 또 청동잔 역시 무령왕릉에서 나온 청동잔 5점과 똑같았습니다. 무령왕릉 것과 같은 공장에서 제작된 은장도와 청동잔으로 보였습니다.”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된 그릇받침 등 토기편.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추정되는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 나온 그릇받침을 연상시킨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한상 교수는 “526년 승하한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추정되는 공주 정지산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그릇받침 등과 거의 똑같은 토기들이 보였다”고 덧붙였다. 무령왕릉과 무령왕비의 빈전(정지산)에서 쏟아진 유물과 비슷한 등급이라면 무슨 뜻인가. 이한상 교수는 “유물의 구성상 왕이나 왕비, 왕족에 비길 수 있는 높은 신분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교수는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된 은장도는 무령왕릉 조성시기(523~525년)와 비슷하고, 허리띠는 무령왕릉 조성시기~부여 능산리 사지 조성시기(567년)보다는 앞선다”고 보았다. 이교수는 “따라서 송제리 고분은 523(무령왕 승하)~567년(능산리 사지 조성) 사이의 공백기를 메워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출토된 은제 허리띠 장식. 하트형 과판의 앞 뒷면과 연결고리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주목되는 백제 성왕

그렇다면 송제리 고분에 묻힌 주인공은 누구일까.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최성락 목포대 교수는 “반남고분군 등 재지세력의 무덤과 떨어진 곳에 홀로 조성된 백제식 고분이 아니냐”면서 “영산강 유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의 무덤은 아닐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지에서 호흡을 나눈 토착세력이라면 나주 복암리 고분이나 반남고분에서처럼 한 곳에 무덤들을 계속 조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송제리 고분은 반남고분과 신촌리 고분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섞이지 않고 외롭게 서있다.

최 교수는 또 “신촌리 고분 등에서 박혀있는 원통형 토기가 송제리 고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서 “재지적인 전통이 없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 국왕이 파견한 왕자나 왕족이 아닐까. 그래서 재지세력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 것이 아닐까. 혹은 높은 신분을 과시하며 독야청청한 것일 수도 있다.

1980년대 도굴된채 발견된 나주 송제리고분. 그래도 발굴결과 무덤방 바닥에서 6세기 백제의 지방지배를 알 수 있는 유물이 쏟아져나왔다.|국립나주문화재 연구소 제공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무령왕(재위 501~523년)의 뒤를 이은 성왕(재위 523~554)을 주목한다.

이번에 확인된 ‘은제관식’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은제관식’이야말로 이번 발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을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의 ‘대표 유물’은 ‘은화관식’(은으로 만든 꽃모양의 관 장식)이다. 전형적인 은화관식은 사비백제 시기(538~660)의 고분인 나주 복암리 고분과 흥덕리 고분 등을 비롯, 충남 논산과 부여, 전북 익산·남원, 그리고 경남 남해 등에서 총 13점 출토된 바 있다.

은화관식은 사비 천도(538년)를 단행한 성왕이 정비한 담로제에 따라 파견된 백제 지방관(6품인 나솔 이상의 고위관료)이 이마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알려져있다. 은화관식은 은판을 접어서 상단은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1쌍이나 2쌍으로 대칭하고 하단은 특수하게 제작된 틀에 꽂아 고정하는 형태로 제작된다.

나주 송제리 고분. 송제리 고분은 마한의 핵심지역인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유일한 백제 돌방무덤이다. 6세기 전반 백제중앙 정부가 파견한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은화관식과 은제관식의 차이

물론 이번에 발굴된 유물은 전형적인 은화관식이라고 할 수 없다. 가운데 대가 있는 것은 은화관식과 같지만 양쪽에 꽃과 같은 장식은 없고 세 개의 가지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재질(은제품)과 제작기법(좌우 대칭과 은판을 오린 다음에 접어 만든 기법)에서 ‘은화관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은제관식’이라는 용어를 붙였다. 이런 은제관식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 이 은제관식의 은판은 고정못을 박도록 했는데, 이것은 천으로 끼우도록 한 은화관식 보다는 고식(古式)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은제관식은 백제중앙정부가 지방 지배를 위해 파견되는 지배층에게 하사한 ‘은화관식’의 과도기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 무덤의 조성시기를 웅진백제(475~538) 말기와 사비백제(538~660) 초기, 즉 500~550년 사이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사비천도를 단행하고 담로제를 정비한 성왕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돌방에서 출토된 호박제 관옥. 도굴당하지 않았다면 어떤 유물이 나왔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따라서 나주 송제리 고분의 주인공은 성왕이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파견한 왕자나 왕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경우 성왕이 정비한 ‘담로’를 다스리던 왕자나 왕족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백제 중앙정부가 영산강 유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재지세력의 수장을 백제의 왕족급으로 극진하게 예우해준 사례일 수도 있다. 이한상 교수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만약 백제 왕족이었다면 죽고나서 원래의 본거지(웅진이나 사비)로 돌아가 묻히지 않았겠느냐”고 보았다.

충남 부여 능산리 36호묘에서 확인된 전형적인 모습의 ‘은화관식’. 백제가 나솔(6품) 이상의 고위관료에게 내려준 위세품이다.|사진출처:오은석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석사논문 ‘백제 ‘銀花冠飾’의 기능과 의미‘에서

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가야와 신라지역과 교류한 증거라 할 수 있는 발걸이(등자·등子)와 안장 고정구가 출토됐다. 발걸이는 철제로 발을 딛는 부분이 세장방형으로 갈라져 있고, 그 윗면에는 방형의 요철이 연속되는 형태이다. 안장 고정구(안장과 말의 가슴 부위를 가죽끈으로 연결해주는 장치)는 원형 철판 중앙에 교구(고정장치)가 부착된 형태이다. 임승경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런 형태의 유물은 의령 경산리와 진주 옥봉 고분군 등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바 있다”고 밝혔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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