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아기 등 120여명, 공항서 8시간 노숙

박지윤 2019. 7. 3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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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팬퍼시픽 항공 또 지연사고

보라카이 관문 칼리보 국제공항서

한국 승객들 컵라면으로 끼니 해결

30일 오전 팬퍼시픽 8Y704편의 지연으로 필리핀 보라카이섬 칼리보공항 에서 밤을 새고 있는 한 어린이 승객. 독자 제공

동남아 대표 휴양지 필리핀 보라카이 섬의 관문인 칼리보 국제공항에서 필리핀 항공사 팬퍼시픽의 항공편이 지연되는 사고가 끊이지 않으며 이용객들의 거센 항의가 계속되고 있다.

30일 오후 1시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은 순식간에 시끌벅적 해졌다. 29일 오후 11시 25분(현지시간) 칼리보 공항을 떠나 다음날인 30일 새벽 4시 50분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팬퍼시픽 8Y704편이 12시 20분에야 도착해서다.

구체적인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8시간 가까이 출발이 지연된 셈이다. 지연된 시간 동안 임산부와 아동을 포함한 120여 명의 승객들이 공항에서 사실상 노숙 생활을 했다. 승객들은 “항공사가 인근 숙박업소로 안내하거나 대체 항공편 등의 편의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며 분노를 쏟아냈다.

가족여행 차 보라카이를 찾았던 최상아(33)씨는 “이제 막 돌 지난 아기가 계속 칭얼거리는데, 항공사 측에서 제공한 컵라면은 먹일 수 없어서 애를 먹었다”며 “밤 사이 추워진 공항에서 방치돼 아이가 열까지 오른 상태”라고 말했다. 임신 5개월 차 양혜미(32)씨는 “특히 건강에 유의해야 하는 때인데 냉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공항에 방치돼 몸 상태가 악화됐다”고 토로했다.

30일 오전 열악한 시설로 인해 정전이 된 필리핀 칼리보 공항에서 승객들이 항공사가 제공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독자 제공

비행 지연 이유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었다. 일가족 여행을 다녀온 한기정(37)씨는 “처음에는 1, 2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는데, 점점 늘어나더니 급기야 8시간이 됐다”며 “영어도 못하는 현지 직원을 세워 놓고, 언성을 높이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식으로 대응했다”고 어이없어 했다. 승객들은 한국인 승무원의 존재를 알았지만, 거센 항의를 우려한 항공사 측의 조치로 이 승무원은 승객들 앞에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인천국체공항 출국장이 소란스러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막 입국한 승객들에게 항공사는 공식 사과 없이 보상금에 대한 공지가 적힌 안내문만을 지급했다. 이런 항공사의 부실한 대응에 승객들이 거칠게 항의하면서 양측이 충돌 직전 상황에까지 가기도 했다.

팬퍼시픽 측은 8Y704편 지연 이유에 대해 ‘기체 결함’을 내세울 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현지 숙박 업체, 대체 항공편 안내와 제공 문제에 대해선 “예약 가능한 호텔이 없었고, 대체 항공편도 마땅치 않았다”고 해명했다.

30일 오전 필리핀 칼리보 공항에서 현지 직원들에게 항공편 지연 이유를 묻고 있는 승객들. 독자 제공

일부 승객들은 귀국 뒤 곧바로 서울 여의도의 팬퍼시픽 한국 본사를 찾아가 집단 항의를 했다. 칼리보 현지에서 통역에 나섰던 김민지(22)씨는 “단체 채팅방에 초대된 승객들을 중심으로 소비자원을 통해 공식으로 피해 진정을 넣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소비자원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라 항공사는 운송이 지연된 해당구간 운임의 일정 부분 이상을 환불해야 한다”며 “승객들이 지연에 따른 기타 피해를 입었을 경우 이에 대해 추가로 보상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국내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으로 이번 항공편을 이용한 승객들은 여행사에 대해서도 분통을 터뜨렸다. 모두투어를 이용한 지현진(28)씨는 “지연될 때 곧바로 여행사 쪽에 연락했지만 ‘항공사와 해결할 일’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고 말했다. 인터파크의 투어 상품을 구매한 원종미(40)씨도 “항공편 지연은 어느 항공사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여행사 입장에서는 보상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현재 모두투어, 하나투어, 노랑풍선 등 대부분의 국내 주요 여행사에서는 팬퍼시픽 항공편을 포함한 저가 패키지 여행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8시간이 지연된 30일 오후 12시 20분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승객들에게 팬퍼시픽이 제시한 안내문에는 사과 없이 보상금에 대한 내용만 적혀 있다. 박지윤 기자

팬퍼시픽의 지연 사태는 이번 한 번이 아니다. 지난 22일에도 기체 결함을 이유로 운항이 지연돼 원성을 샀다. 칼리보 공항에서의 출발이 늦어지면서 23일 오전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일정도 10시간 가까이 지연되기도 했다. 필리핀 보라카이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팬퍼시픽의 지연 사고는 최근 1, 2주 사이에만 수 차례 발생했다. 항공사 측은 내부 규정에 따라 승객들에게 현금 5만원씩의 보상금을 지불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지난해 7월 이후 1년간 팬퍼시픽으로부터 항공편 지연에 따른 보상을 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항공안전을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국제항공과 관계자는 “외국 항공사가 처음 취항할 때는 국토부의 내부규정에 따라 안전 설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 점검한다”며 “특정 항공사가 비행기 결함으로 잦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 종합적인 감독을 거쳐 본사나 현지 항공당국에 개선을 요구할 수 있다”고 밝혔다.

팬퍼시픽 항공은 1973년 설립된 필리핀 국적사다. 총 4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는 소규모 항공사인데 2017년 5월부터 인천-칼리보(보라카이) 노선에 취항했다.

영종도=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mailto:luce_jyun@hankookilbo.com)

이환직 기자 slamhj@hankookilbo.com(mailto:slamh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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