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A 이병, 자네는 여성향인가 남성향인가?"..중대장님, 왜 그러셨어요?

강푸른 2019. 8. 2.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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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일요일, 함께 차를 타고 KBS 보도국으로 향하는 내내 A 씨는 말이 없었습니다. 조용한 사람인가, 내가 어려운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어려운 인터뷰를 앞두고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털어놓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지난달 제대한 예비역 육군 병장 A 씨는 동성애자입니다. A 씨가 스스로 이를 밝히는 걸 '커밍아웃(coming out)'이라고 합니다. 반면 함부로 A 씨의 성적 지향을 폭로하는 걸 일컬어 '아우팅(outing)'이라고 부릅니다. 성 소수자를 심하게 차별하는 사회일수록 아우팅의 여파가 큽니다. 직장이나 가족 등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A 씨도 군대에서 아우팅을 당했습니다. '00이 사정 알지?', '00이 남자 좋아한다' 같은 말로 A 씨의 성적 지향을 퍼트린 사람은 소속 부대 훈련 중대장 B 대위였다고 했습니다. A 씨의 마음은 서서히 망가졌습니다. 병원에서는 우울함이 심한 양극성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고, 자·타해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KBS는 지난달 31일, A 씨의 사연을 소개하고 해당 부대가 B 대위에 대해 징계 절차를 밟고 있다는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보도가 나간 뒤, 군인권센터는 A 씨 사건에 대해 보도자료를 내고 성소수자 차별·침해, 성희롱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출했다고 밝혔습니다.

[연관기사][단독] “A 병장 게이인 거 알지?”…성 소수자를 대하는 軍의 자세

중대장 B 대위는 첫 만남부터 A 씨의 성적 지향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병교육대 소대장이 말해 줬다고 했습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겼다가 나중에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웠던 A 씨가 신병교육대 대대장에게 커밍아웃을 했던 게 발단이었습니다. 대대장이 A 씨의 동의를 받고 이를 같은 신병교육대 소대장에게 알렸는데, 그 소대장이 A 씨 몰래 자대 중대장에게도 말해버린 겁니다.


B 대위가 A 씨의 성적 지향을 이야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B 대위는 다른 병사들에게는 '병력 관리'라는 이유를 댔고, 당사자 A 씨에게는 '너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이란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생각을 바꿔볼 마음이 없겠느냐"며 여자를 만나보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만났던 사람 나잇대는 어떻게 되느냐, 여성향이냐 남성향이냐 같은 성희롱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병력 관리를 하는 데에 제 성관계 자세를 아는 게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자꾸 부대 안에서 성범죄를 일으켰던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들은 동성애자여서 그런 게 아니라, 성범죄자여서 그런 거잖아요. 제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 같았어요." A 씨의 항변처럼, 부대 내 성범죄가 모두 동성애자 병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병대 대위 출신인 방혜린 군인권센터 간사는 "남군 간 성폭력 문제는 위계에 의해 발생하거나 성적으로 모멸감을 주고 싶은 악랄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며 "성적 지향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평소의 제 멘탈(정신 상태)이 '철판'이라면, 그때는 '은박지'였어요. 그냥 툭 던지는 말에 찢어져 버리는 거예요." 힘들었던 병영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A 씨는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말이 없다고 생각했던 첫인상과 달리 A 씨는 여러 상황에 빗대어 자신의 속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인터뷰 중 주목을 끄는 대목은 군대 안 동성애자가 곧 범죄자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동성애자에 대한 '배려' 뒤에 숨은 '폭력성'이었습니다.

"B 대위는 제가 전역한 뒤에도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걱정돼서 그런 권유를 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사회에서 여자는 성차별을 당하니까 성전환 수술을 받아라', '인종 차별을 당할까 걱정되니 피부색을 바꿔 봐라', '장애인인 걸 알면 차별받으니까 장애를 숨겨라'…. 이렇게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A 씨는 그런 '오지랖'이 더 폭력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저 군 생활 열심히 했거든요. 병사들도 제가 동성애자인 걸 밝혔을 때 아무도 불편해하거나, 차별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B 대위는 제가 '성적 지향 때문에 힘들어 한다'고 판단하고, 원하지도 않은 도움을 줬어요. 동성애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언젠가는 부대 안에서 사고를 칠 예비 범죄자도 아닙니다."


기사가 나간 뒤, 일부 포털 사이트에는 'B 대위가 이상한 행동을 한 건 맞지만, 그건 B 대위만의 문제'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A 씨는 그저 운이 없던 걸까요? 지난 사건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2006년, 한 지휘관은 동성애자 병사에게 '전역하고 싶으면 남자와 관계하는 동영상을 찍어오라'고 시키는가 하면, 성 소수자를 진료하던 정신과 군의관은 '성관계에 대해 묘사해 보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2년 전엔 '게이 데이팅 앱'에서 성관계를 하자고 유인하는 문자를 보내 성적 지향을 확인하는, 이른바 '함정 수사'를 통해 동성애자 육군 병사를 색출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3월에는 해군에서도 휴대전화 포렌식까지 하며 성 소수자 병사를 색출했던 일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세계 최대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지난달 11일, 성 소수자 군인들의 인권 실태에 대한 55장짜리 보고서를 내고 "한국 군대는 성 소수자를 적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성 소수자를 존중은 하는데 이해를 못 하겠대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제 존재가 왜 이해를 받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할까요? 사람은 모두 '당연히' 존재하는 건데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을 때, A 씨는 "차별 없는 세상을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그런 세상은 안 올 것 같아요." 긴 인터뷰로 한결 편해진 듯, A 씨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습니다. 하지만 가슴 한편을 아프게 하는, 그런 미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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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푸른 기자 (strongbl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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