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시시각각] 일본의 안보상 가치 잊었는가
극대화된 북한 위협 감안한다면
최소한의 안보협력은 유지해야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일본은 여러 번 한국의 안보에 큰 도움을 줬다. 1970년대 초 중국과의 데탕트를 원했던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마오쩌둥 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국 내 유엔사령부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유엔사가 사라질 경우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던 미군의 한반도 주둔 명분은 크게 약화한다. 북한이 비동맹국가를 등에 업고 유엔사 해체를 위해 맹렬히 뛴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한국을 도와 유엔사 해체를 막은 게 일본이다. 1973년 유엔 총회에서 일본 대표는 이렇게 역설한다. “정전체제 유지에 관한 관련국 간 사전합의가 없는 한 일방적 유엔사 해체는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다”고. 한국 주장 그대로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모두 빼려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77년 1월 월터 먼데일 부통령이 일본에 와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알리자 자민당 의원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 청원까지 냈다. 2개월 후 미·일 정상회담차 워싱턴에 간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는 “‘철수’ 대신 ‘감축’으로 가야 한다”고 카터를 설득했다. 이 무렵 터진 코리언 게이트로 박정희 정권은 입도 뻥끗 못 할 처지였다. 결국 전면 철수를 고집했던 카터는 감축으로 돈다. 미 행정부 내 반대 탓도 컸지만, 일본의 로비가 한몫했다는 게 정설이다.
일본이 한국 편을 든 건 물론 자국의 이익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기야 어떻든 두 나라의 안보상 이해가 맞아떨어져 이렇듯 협력한 때는 적지 않았다. 특히 아시아 동맹국을 지켜주겠다는 미국의 안보 약속이 불안해질수록 한·일은 밀고 끌었다. 불행히도 바로 지금이 딱 그런 때다.
지금 한국은 한·일 전면전에 매몰돼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두 가지 큰 변화를 외면하고 있다. 우선 북한의 위협이 1년 전과는 비할 수 없게 커졌다. 북한은 지난달 23일 3000t 이상으로 보이는 잠수함을 공개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3기를 너끈히 실을 크기다. 이 추정이 맞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이 잠수함으로 몰래 접근해 미 본토를 핵 탑재 SLBM으로 때릴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럴 경우 미국이 뉴욕·LA에 북핵이 떨어질 걸 각오하고 우리를 지켜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지난 5월 이후 북한이 연달아 쏴 올린 발사체는 모두 최대 사거리가 600㎞ 안팎이었다. 죄다 일본도 못 닿을 단거리 미사일, 또는 신형 방사포였다. 그렇다면 이들 무기는 누굴 겨냥해 개발됐다는 말인가.
한국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미국의 약속이 갈수록 미덥지 않다는 것도 중대한 변화다. 2년 전 북핵 위협으로 국내에서 핵무장론이 힘을 얻자 미 행정부는 ‘확장억제 전략’을 내세우며 한국을 다독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은 이 전략의 실체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 내용을 물으면 그저 “북한 도발 시 북녘땅을 주차장으로 만들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한다. 매년 열기로 했던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마저 지난해 1월 이후 무소식이다.
한·일 간 갈등이 악화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터무니없는 미국의 방위분담금 인상 요구에 공동 대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아베 정부는 서로 돕기는커녕, 한·미·일 3각 안보협력에서 한국을 빼려는 분위기다. 옛 안보 파트너의 소중함을 무시한 데 따른 후유증이다. 그러니 사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최소한의 안보 협력 관계라도 유지해야 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생존을 위해 손을 맞잡았던 한·일 간 안보 협력의 기억을 끌어내 되새겨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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