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일, 과거 문제 종결 짓고 미래로 나아갈 때"

유동주 기자 2019. 8. 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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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일제 후지코시 강제징용 피해자 88세 황완열 할머니 "일본은 '한국은 속국'이란 생각버리고 한국은 일본 뛰어 넘어야"


황완열(88) 전북 정읍거주. 일제 후지코시 강제징용 피해자/사진=유동주 기자




“도야마현 도야마시 후지코시 20번지 후지코시강재공업주식회사”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1932년생인 황완열 할머니는 미쓰비시, 신일본제철 등과 함께 3대 일제 징용 작업장으로 알려진 후지코시의 당시 주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같이 일하던 어린 동료 학생들이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글씨를 잘 쓰던 할머니가 도맡아 써줬기 때문이다.

전주국민학교에 다니던 1944년 봄, 일본에 가서 일하며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학교와 교사의 꼬임에 후지코시에서 일하게 됐다.

◇"'공부'도 할 수 있다고 속였지만 하루 종일 기계만 돌려"

"다니던 학교에 20명 배정돼 뽑혀갔고 조선인 교사인 '가나야 선생'이 인솔자로 따라갔다. 3년 동안 공부를 하며 일하는 것으로 알고 갔는데 가서 보니 전국에서 모여 든 어린 학생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할머니는 “공부는 못 하고 일만 시킬 줄 알았으면 그 어린나이에 일본까지 갔겠냐"며 “봉급은 전혀 받은 적 없고 일본 가서 공부를 잘하면 대학까지 원하는 만큼 진학할 수 있다고 했다”고 기억했다. 어린 학생들을 군수 물자 생산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 유학'처럼 생각되도록 속였다는 것이다.

초기엔 후지코시 기숙사 환경이 조선의 주거 상황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1940년대 전시 동원체제시기 조선에서의 힘든 상황에 비춰보면 처음엔 그나마 나아보였다는 증언이다.

주요 일제 강제동원 작업장 중 후지코시강재는 어린 소녀들이 가장 많이 끌려간 곳이다. 후지코시는 일제 강제동원 문제 중에서도 ‘근로정신대 최대 동원’의 전범기업으로 알려져있다. 1000여명이 넘는 어린 소녀들과 500명 넘는 남성들이 동원된 곳이다.

가능한 물적·인적 자원이 전쟁에 동원되던 전시 동원체제라해도 작업환경이 어린 아이들이 일하기엔 무리가 있는 공장이었다. '제로센(零戦)' 등 군수용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공작기계를 다루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비행기 부속으로 쓰이는 부품을 만드는 공작기계에 배치됐는데 키가 작은 어린 아이들이라 나무상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기계를 다뤘다”며 "여학생들이라 치마나 머리카락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크게 다치는 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작업환경과 불합리한 지시에 대해 일본인 작업반장에게 따지다 혼나기도 했다는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라 시키는 대로 일하기만 했지만 작업 중에 다치고 하는 억울한 문제에 대해선 항의했다"고 말했다.

황완열(88) 할머니. 전북 정읍 거주. 일제 후지코시 강제징용 피해자/사진= 유동주 기자


◇갑자기 맞은 '광복', 군수공장 일에서 해방된 날

어린 학생들은 군수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일과를 보내다 광복의 순간도 공장에서 느닷없이 맞이했다.

“1945년 8월 더운 어느 날 운동장에 아이들과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라디오를 틀어줬는데, 방송을 듣자마자 일본인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울기 시작했는데 그때야 전쟁이 끝났다는 걸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뒤엔 오히려 대우가 나빠졌다. 그동안 정상적으로 나오던 식사도 달라졌다. 그나마 제대로 나오던 식사도 항복선언 이후부턴 찐 감자로만 채워졌다. 식욕이 왕성하던 아이들은 고픈 배를 달래기 위해 몰래 공장 밖으로 나가 근처 감나무에서 감을 따와 먹기도 할 정도였다.

해방 후 귀국선으로 고향에 돌아 올 수 있었던 할머니는 전주여상에 진학했고 졸업 뒤엔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베 같은 사람은 한국을 아직도 속국으로 아는 것 같다"

할머니는 최근 일본과의 갈등상황에 대해선 걱정이 많았다.

"아베 총리 같은 나이 든 사람들은 한국을 아직도 속국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할머니는 "하지만 한국와 일본은 어느 나라보다 지역적으로 가까운 이웃이고 지금처럼 불매운동을 하고 갈등이 고조되기만 하는 건 두 나라 모두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해방이 된 지 오래됐고 과거의 문제는 이번 기회로 종결을 짓고 미래로 나아갈 때"라고 말했다. 다만 할머니는 일부 한국 정치인들이 양국 갈등상황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라디오로 매일 뉴스를 꼬박꼬박 듣는다는 할머니는 "정치인들이 뜻이 달라도 일치단결해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참아야 할 때가 있다"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일본을 꼭 적으로 볼 필요도 없고 상전 모시듯 할 필요도 없다"며 "나이 든 일본인들은 '한국은 속국'이란 생각을 버려야 하고 젋은 한국인들은 일본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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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주 기자 lawmak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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