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우연히 찍은 사진 한 장 생태연구에 '값진 자료'가 됩니다"

김기범 기자 2019. 8. 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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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전문 연구자들의 현장 공백 메우는 ‘시민 과학자’들

‘점박이물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점사모) 회원인 장세인씨가 매일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백령도 점박이물범. 김기범 기자

백령도 끝섬전망대 근무 장세인씨 하루도 빠짐없이 모니터링 기록 아프리카 보츠와나 맹수 다섯 종 관광객들 찍은 수많은 사진으로 활동반경·개체 수·서식지 파악 제주 남방큰돌고래 관찰에도 활용

“5월16일. 안개 조금. 2번 바위 물범 50여마리.” “6월11일. 맑음. 인공쉼터 주위에 물범 30여마리가 머리만 내밀고 있음.” “6월14일. 안개 후 맑음. 물범바위 2번 바위에 10여마리가 아침 9시30분쯤 보였으나 11시30분쯤 낚싯배 두 척이 있어서 그런지 이후로는 보이지 않음.”

인천 옹진군 백령도의 끝섬전망대에서 근무하는 장세인씨가 매일 기록하고 있는 ‘점사모 하늬바다 물범쉼터 일일 모니터링’ 내용이다. 생태학자가 야생동식물에 대해 조사한 뒤 기록하는 ‘야장(Field book)’에나 써 있을 만한 내용을 ‘점박이물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점사모) 회원인 장씨가 수시로 물범 관찰 뒤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16일부터다. 점박이물범 주요 서식지인 하늬바다 앞 물범바위를 항상 관찰할 수 있는 끝섬전망대에 상주하는 장씨에게 인천녹색연합에서 물범 보호활동을 벌이고 있는 박정운 국장이 모니터링 기록을 남길 것을 권유했다. 아직은 4개월치 정도의 관찰기록만 쌓여있지만 앞으로 매일매일의 기록이 꾸준히 쌓인다면 국내 어떤 전문기관도 갖기 어려운 방대한 데이터가 마련될 수 있다. 지난달 17일 끝섬전망대에서 만난 장씨는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망원경으로 물범들을 보고, 수시로 물범들이 있나 습관처럼 확인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각각 백령도 내의 유일한 중학교, 고등학교인 백령중과 백령고 학생들로 이뤄진 ‘점박이물범생태학교동아리’도 월 1회 점박이물범 모니터링에 나서고 있다. 학생들은 물범바위가 육안으로 보이는 하늬바다 해변에서 망원경으로 물범바위를 관찰해 개체 수를 세고, 물범들을 사진촬영하고 있다.

점사모나 백령중·고 학생들처럼 해당 동물을 일상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이들의 기록과 사진, 또는 불특정 다수가 우연히 촬영한 사진과 위치정보 등이 최근 생태연구에서 톡톡한 공을 세우고 있다. 항상 현장에 있기 어려운 전문 연구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공백을 시민과학자들이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찍어 서식지 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 수컷 사자들(왼쪽)과 하이에나.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예를 들어 최근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는 다수의 관광객들이 찍은 사진이 맹수 다섯 종의 생태 연구에 도움을 준 사례가 나왔다. 지난달 22일 국제학술지 ‘커런트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발표된 내용을 보면 아프리카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보츠와나 오카방고델타 지역을 찾은 관광객들이 찍은 2만5000여장의 사진이 다섯 종류의 포식동물 조사에서 활동 반경과 개체 수, 주 서식지를 파악하는 데 사용됐다.

연구진은 26개 그룹의 관광객에게 위성항법장치(GPS) 추적기를 제공했으며 이들이 촬영한 사자, 표범, 치타, 점박이하이에나, 들개 등의 사진과 위치정보를 제공받아 분석했다. 관광객의 사진을 이들 동물의 생태 연구에 활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프리카 모잠비크 남부 산호초지대에서도 멸종위기인 작은눈가오리 연구에 관광객들이 잠수해서 찍은 사진 속 가오리의 무늬를 통해 가오리 개체 식별이 가능함이 알려진 바 있다. 모잠비크해양거대동물협회 등 연구진은 2003년 이후 관광객들이 촬영한 140여장의 사진을 분석해 70마리를 식별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관광객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제주 남방큰돌고래 사진이 모니터링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문을 지난해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가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지나친 관심은 야생동물들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해당 동물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관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제주 남방큰돌고래의 경우 육상 관찰은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지만, 배를 타고 나가서 보는 해상관광이 돌고래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는 해상관광업체들의 남방큰돌고래 교란을 막기 위해 주의사항을 담은 보호종관찰가이드를 배포한 바 있다. 이 관찰가이드에는 돌고래에게 먹이를 주지 말 것과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지 말 것, 이동 경로를 막지 말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백령도 점박이물범의 경우 올해 들어 인공쉼터 조성 등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물범들이 피해를 입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물범 사진을 찍으려는 방송사 촬영팀이 드론을 물범들에게 가까이 접근시키면서 바위 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물범들이 물속으로 내려가버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인천녹색연합 황해물범시민사업단 박정운 단장은 “백령도 주둔 군부대에 따르면 지난 4~6월 사이에만 드론을 이용해 물범을 촬영한 건수가 10건이 넘는다”며 “물범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학술조사 이외 목적의 드론 촬영을 관리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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