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이미 69년 전에 사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차 한잔 나누며]

조병욱 입력 2019. 8. 9.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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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1000명 찍은 라미현 작가 / "목숨 걸고 한국 지켰단 '자부심' 카메라로 기록" / 그들이 바라는 건 잊히지 않는 것 / 英·美 오가며 사진 찍어주고 선물 / 사학과 중퇴 후 사진학과로 전향 / 노병들 살아있는 역사 담아 뿌듯 / 2020년 6·25 70주년 맞아 美 출국 / 2년간 50개주 돌며 용사들 기록

“어르신은 이미 69년 전에 사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지하 스튜디오에서 만난 사진작가 라미현(본명 현효제·40)은 한국전 참전용사의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고 있다. 그는 찍은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해외로 보낸다. 그럴 때마다 “얼마를 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현 작가가 하는 대답이다.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스튜디오에서 라미현(본명 현효제) 사진작가가 자신이 찍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참전용사 사진 밑에는 액자 제작비를 후원한 사람의 이름과 ‘당신 덕분에 내가 살아있습니다. 당신은 영웅입니다’라는 문구가 영어로 쓰여 있다. 이제원 기자
현 작가는 프로젝트 솔저(www.project-soldier.com)라는 군인을 기록하는 사진 시리즈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 그의 카메라 앞에 선 국내외 참전용사만 1000여명에 이른다. 그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제복을 입은 그들의 신념, 자부심을 렌즈로 포착해 군인의 진정한 모습을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개인 프로젝트다. 외부의 도움 없이 사비로 진행하고 간혹 뜻있는 사람들이 액자 제작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처음에는 국군, 주한미군,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원회 등 현역 군인을 찍는 데서 출발해 군인 가족 등 지금까지 국내에서만 5000명이 넘는 인물 사진을 찍었다.

이 프로젝트가 참전용사로 확대된 것은 몇 년 전 한 전시회에서 만난 노병 때문이다. 그는 “미 해병 1사단 출신의 80대 참전용사의 사진을 찍을 때였다. 그의 눈에서는 현역 군인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내가 한국을 지켰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며 기록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사비로 그동안 미국과 영국을 16번이나 다녀왔다. 현 작가는 “이제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80∼90세로 나이가 많다”며 “돈 버는 일은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그분들을 기록하는 건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고 강조했다.
현 작가는 한양대 사학과에 다니다 중퇴하고 미국으로 가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예술대학(AAU)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원래 컴퓨터그래픽을 전공했다가 우연한 계기에 사진에 빠져들었다.

그는 “한 유명한 감독에게 당신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더니,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그걸 기르려면 ‘1년에 사진을 10만장 정도는 찍어야 할 것’이란 답을 들었다. 하루에 360장 정도는 찍어야 하는 일인데, 그날부터 카메라를 사서 찍기 시작, 1년이 지나니 13만장이 됐다.

그는 “매일 걷는 길도 유심히 보면 빛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다. 그것이 관찰력을 키우고 나만의 시각을 만드는 일이었다. 다시 메일을 보내 그 이야길 했더니 그 사람은 내게 ‘누구세요’(who are you?)고 되묻더라. 나와 비슷한 학생들의 메일이 하루에도 수백통이 온다고. 자신의 말을 실천한 사람은 4∼5년 전 한 여학생 이후 내가 처음이라고 말해줬다. 그 길로 사진학과로 전과했다”고 말했다.
정규 학위로는 역사학도의 길을 마치지 못했지만 현 작가는 한국전쟁을 기록하는 새로운 의미의 역사학도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참전용사들을 만나다 보면 외국인이지만 기묘한 친밀감이 느껴진다”며 “처음 시작할 때는 두려움도 많았는데 한국에서 온 젊은 사진가가 자신들을 기억해주고, 그것을 기록해 보내주면 너무 고마워한다. 태평양 건너 한국이란 곳에 와서 젊음을 바쳤는데 이제는 그들을 잘 기억해주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 작가는 “92세의 버나드라는 미군 참전용사가 있는데 하루는 손녀딸이 영상을 보고 있기에 뭐냐고 물으니 코리아 가수라고 했다. 그게 방탄소년단(BTS)이었는데, 자신이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를 해줬더니 다음날 손녀딸 친구들이 몰려와 ‘할아버지가 방탄소년단이 있게 해준 영웅’이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웃었다.

현 작가는 내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2년간 미국을 누비며 참전용사들을 만나 사진을 찍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는 “한 달에 2개주씩 돌면 2년이면 50개 주를 거의 다 돌 수 있다. 이제 참전용사분들은 나이가 많아 집에 계시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만 400명이 돌아가신다고 한다. 작년에만 18만명이 돌아가셨다. 그분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느 회사에 다녔던 누구로 기억되기보다 한국전 참전용사로 기억되고 싶다고 한다”고 말했다.

현 작가는 “언젠가 한 한국인 참전용사께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드렸더니 자신이 이런 것을 받아도 되느냐, ‘내가 무엇을 한 게 있다고’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음이 아팠다. 그분은 자부심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부가 그동안 그분들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우리 주변에 찾아보면 아직 참전용사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분들께 감사의 편지라도 한 장 보내고, 길에서 만나면 나라를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그 한마디를 해주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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