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안해도.. 대졸 4000명에 정부가 월 150만원씩

표태준 기자 입력 2019. 8. 10. 01:45 수정 2019. 8. 1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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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기부, 2년간 예산 1000억 투입.. 대학서 연구원으로 기간제 고용
졸업생 "석달간 열흘도 출근 안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작년 8월 청년TLO 지원자 모집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강원도 소재 이공계 대학 졸업생 박모(24)씨는 2월 졸업 후 온종일 도서관이나 카페에 앉아 토익 공부를 하면서 기업 채용 공고를 뒤져보는 게 일과다. 하지만 그의 통장에 5월부터 매달 158만원이 '월급'으로 들어온다. 통계에도 박씨는 기간제 근로자, 즉 '취업자'로 잡힌다.

기록상 박씨 직장은 출신 대학 한 교수 연구실이다. 근무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이고 업무 내용은 '논문 분석 및 실험 진행'이다. 하지만 실제 출근한 날은 석 달 중 열흘도 안 된다. 박씨는 "출근한 날도 테이블 정리나 잔심부름 정도만 한 게 전부"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박씨 같은 사람을 '청년TLO(기술이전전담인력)'라고 부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미(未)취업 이공계 대학 졸업생의 취업을 지원하겠다'는 명분으로 작년 도입한 청년TLO 사업이 파행하고 있다. 청년TLO는 교수 연구 보조 등의 일을 하며 대학이 가진 기술을 전수받게 돼 있지만, 대상 청년과 학교는 이를 "일 안 하고 돈 챙길 수 있는 '꿀알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부는 이 사업에 작년부터 1년여간 예산 1052억원을 투입했다. 올해는 청년TLO 4000명을 '고용'한다. 그만큼 청년 실업자 수는 줄어든다.

'근무' 여건은 학교마다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본지 취재에 응한 청년 TLO들은 한결같이 "애초 기술 이전이 필요해서 지원한 게 아니긴 했지만, 학교 측이 아무런 일도 안 시켜 돈 받기 미안할 정도"라고 했다.

청년 TLO 사업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작년 7월 처음 도입했다. "이공계 청년의 잠재력 청년 TLO로 펼쳐보라"는 광고와 함께, 예산 468억원을 전국 67개 대학 산학협력단에 지원해 이공계 졸업생 3330명을 1기 청년 TLO로 6개월간 채용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올해 7월 말 기준 이 중 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1327명. 취업률은 40%다. 2018년도 대학 평균 취업률(62.8%)보다 낮다. 그런데도 과기부는 올해 또다시 548억원을 투입해 2기 청년 TLO 4000명을 채용하고 있다.

연세대 1기 청년 TLO 출신 장모(29)씨는 "정작 기술 이전 교육이 필요한 공대생들은 원래 취업이 잘돼 이 사업에 지원할 필요가 없고, 취업 안 되는 자연대·이과대생만 바글바글했다"며 "이들 입장에선 전수받을 기술도 없고 일도 거의 안 시키니 사실상 국가에서 주는 청년 수당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고 했다. 강원도 A대 TLO 박모씨는 "처음부터 교수님도 '방해 않을 테니 취업 공부나 열심히 해서 취업률만 올려라'는 분위기였다"며 "솔직히 우리 입장에선 하던 일 하면서 돈 받는 건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제도가 취지대로 운영되길 바라는 학생도 있다. 경북 경산시 C대학 졸업생 안모(24)씨는 "연구실 보조를 하며 기술을 익히게 해준대서 지원했는데 교수님이나 청년 TLO 담당자나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며 "많은 세금이 드는 사업인데 출근도 안 하고 용돈 벌이로 여기는 졸업생이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정부 예산으로 '월급'이 나가지만, 근로감독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경기도 B대학 졸업생 윤모(28)씨는 "근태 확인이 허술해 주변 친구 중에는 다른 대학 연구실에서 인턴을 하는 '투잡'을 뛰고, 근무시간에 여행을 가거나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강원도 A대학에선 직원 2명이 100명에 가까운 청년 TLO를 관리한다. 하지만 관리 직원들은 청년 TLO 개개인이 연구실 내 어느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남대 관계자는 "전산으로 출퇴근 기록을 입력하도록 하고 있지만, 청년 TLO 참가자들이 각각 연구실에 흩어져 있어 일일이 근무 실태를 파악할 수는 없다"고 했다.

대학도 이런 사태를 예상했다. 1기 청년 TLO 참가 대학 모집 당시 최초 공고에 응한 대학은 19곳에 불과했다. "실효성이 적고 기업에 채용 부담을 떠넘겨 기술 이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퍼질 것"이라며 대학들이 참가를 꺼렸기 때문이다. 결국 과기부 실·국장들이 대학을 돌며 '기술 이전과 관련 없는 취업도 청년 TLO 취업률로 인정하겠다'는 식으로 설득하고 나서야 48개 대학이 추가 모집됐다.

애초 무리한 시도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짧은 기간 연구 보조 일을 한다고 시장이 요구하는 전문성을 갖추기는 어렵다"며 "다른 일자리 사업처럼 청년 실업률을 가리려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복지 정책에 가깝다"고 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규제 완화와 중소기업 투자로 일자리를 창출해야지, 대학 졸업생을 6개월 더 붙잡고 교육한다고 시장에 없던 일자리가 갑자기 생길 리 없다"며 "사상 최대 청년 실업률이란 급한 불을 끄려다 생긴 모호한 사업"이라고 했다.

과기부 관계자는 "제도엔 문제가 없다. 상·하반기에 한 번씩 대학 전수조사를 나가 근태 관리가 잘 이뤄지는지 확인하고 있다"며 "참가 대학이 많아 제대로 관리가 되지 못한 점은 대학 불시 점검을 강화해 보완하겠다"고 했다.

☞청년 TLO(Technology LicensingOfficer·기술이전전담인력) 사업

'대학이 보유한 기술을 사회로 이전하겠다'는 취지로 정부가 작년 7월 시작한 사업. 34세 이하 미취업 이공계 대학 졸업생을 대학 연구원으로 6개월간 채용해 연구 보조 등의 업무를 맡기고 월 150만원 정도 급여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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