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日 공식 발표 전부터 규제, 사드 사태보다 더 큰 보복 우려됐죠"

양종곤 기자 입력 2019.08.12. 14:31 수정 2019.08.1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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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거래 중소기업인의 한탄
"日 , 6월부터 안 하던 서류 요구
이대론 영세업체 수입 제대로 못해
부품소재 국산화만 외칠 것이 아니라
화평법·화관법 각종 규제 철폐해야"
[서울경제] “중국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때와 달리 이번에는 삼성전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잖아요. 제 주위 대표들은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이 어려워지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많아요. 삼성전자와 엮이지 않은 국내 기업이 어딨겠어요. 그런데 일본의 보복은 시작된 지 한 달도 더 됐어요. 사드 때도, 이번에도 정부가 왜 빨리 대응을 하지 않은 거죠.”

업력 14년의 표면처리 약품전문기업 A사의 김기호(가명) 대표는 최근 서울경제와 만나 이처럼 말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지난 2일 일본이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미 일본에서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조치였는데, 정부가 어떤 대응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많은 기업들이 사드 보복 때보다 심각한 통상 피해가 있을 것 같아 불안해한다”고 전했다.

중소기업계에 따르면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이미 한 달 전에 시작됐다. 김 대표의 경우 지난 6월29일 일본 화학업체 B사의 대리점에 주문한 ‘테프론 수지’를 지금까지 받지 못하고 있다. 분말로 수입하는 테프론 수지는 금형 제품의 표면처리에 쓰인다. B사와 대리점은 지난달 11일까지 사용처가 어디인지부터 주소, 사용 목적 등에 관한 상세한 내용의 서류를 김 대표에게 요구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일본으로 갔는데, 대리점주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주기적으로 거래를 해왔던 곳이었습니다. 수입할 때마다 서류는 당연히 필요 없었고, 가끔 어떤 용도로 쓸지 물어보는 정도였죠. 이제는 수입한 원료가 핵무기로 쓰이지 않는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넘기라는 식이니 황당했습니다.”

김 대표는 같을 달 말 일본 업체 C사에도 화학 약품 3종을 주문했는데 이번에는 일본 정부가 거래를 막았다. 김 대표에게 약품을 수출하려던 일본 대리점은 “고베 세관이 지난달 23일까지 해비판정증명서(비해당증명서)를 제출하라고 했다”면서 현재까지 약품을 보내지 않고 있다. 일본은 군사용으로 쓰일 가능성이 있는 원료를 수출할 때 이 해비판정증명서를 통해 비군사용임을 수출업자에 증명하도록 한다. 하지만 김 대표가 2004년 회사를 세우고 일본에서 화약 약품 수입하는 과정에서 해비판정증명서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대표가 겪은 일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를 배제함에 따라 다른 기업 역시 맞닥뜨릴 상황이다. 하지만 일본은 지난 2일 공식적으로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발표하기 한 달 전부터 이를 사실상 이 조치를 적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 달 전부터 일본과의 거래 절차가 까다로워진 이유는 민간기업이 미리 움직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곧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시작됐다는 뉴스가 연일 나왔는데, 어떤 일본 기업이 기존처럼 우리와 거래를 할 수 있었겠냐”며 “민간도 알아서 준비했고 일본 세관들도 중앙 정부의 눈치를 보고 움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2016년 중국의 사드 갈등과 비슷한 양상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중국은 ‘사드 보복’이라고 공언하지 않았지만, 국내 기업은 늦어지고 까다로운 통관 절차로 인해 납품이 지연되는 피해를 겪은 곳이 많았다.

이처럼 통관의 특성이 이번에도 기업에 큰 피해를 줄 것으로 우려된다. 중국 사드 보복처럼 일본 수출업체와 세관이 고의로 한국 기업에 수출을 미루고 통관 절차를 지연하더라도 기업이 문제 삼기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수입 심사를 위한 서류 준비와 입증 책임은 사실상 우리나라 기업이 떠안게 되는 구조다.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본격적으로 실시 되면, 수출심사를 위한 서류는 일본 수출업자가 일본 세관에 제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 수출업자가 수출품의 용도, 효과 등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저희와 같은 수입업체와 생산업자에게 요구하겠지요. 영세한 수입업체들이 일본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수준에 맞춰 서류를 제출하긴 어려울 겁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직접 전면에서 나서 상황을 통제한다는 점과 수출보다 수입이 문제로 불거진 점 등은 사드 사태보다 상황이 어렵게 전개될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운다. 이미 상당수 기업은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수출 경기 악화와 내수 경기 부진등 이중고로 인해 경영난에 빠진 상황이다. 상황이 더 악화하면 개별 기업을 넘어 산업의 위기가 된다. 현재 글로벌 체인은 한국이 일본의 주요 소재·부품을 수입해 중간재를 생산하면, 글로벌 기업이 제품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김 대표는 정부가 발등의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소재 국산화에 나서는 상황이 답답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부분 표면처리 원료가 일본에서 수입되다 보니, 국내에는 원료 개발 기술은커녕 정확한 업체 수(도금업체)와 같은 기본적인 정보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소재 국산화를 위한 토양이 그만큼 척박하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우리 제품은 일본보다 앞서 있다, 입증할 자신이 있다”고 대기업을 찾아가도 늘 외면받았다. 점차 강해진 환경 규제도 그의 원료 개발 의지를 꺾었다.

“화관법, 화평법 같은 환경규제 아래서는 제대로 원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를 원료 실험을 하면, 최소 3개월 동안 연구원들이 밤새 매달려야 합니다. 새로운 원료가 아니라 대체 원료를 개발하는 데도 몇 개월이 걸린다는 겁니다. ‘대기업이 왜 우리 같은 중소기업의 연구를 기다려주고 거래를 맺어야 하냐’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대기업이 국산화에 나설 때 우리끼리 얼마나 싸울 지도 걱정이네요. 대기업 마음(계약)에 들려고 업체 간에 비방하는 일은 예전에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정부가 정말 적극적으로 나서 중심을 잡고 도와줘야 할 때입니다.” /양종곤기자 ggm1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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