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나라가 이 따위로 하는 게 어딨나, 불산공장 지금도 못 짓는다"
문재인·우윤근 등 일조
한·일 갈등 뒤 소재 독립 외치지만
님비·혐오 조정 역량엔 의문 여전
일본 수출 규제 3대 핵심 소재 불산공장은 왜 좌절됐나
밀양시장 등을 지내고 여수광양항만공사 초대 사장을 지낸 이상조(79) 전 사장은 7년이 지난 지금도 공장 생각만 하면 분이 안 풀리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재직 당시인 2012년 2월 글로벌 석유화학 회사인 멕시켐으로부터 유치했다가 결국 무산된 3000억 원 규모의 불산 공장 얘기다. 불산 원자재인 형석을 중국이 아닌 멕시코 광산에서 들여와 가공한 후 일부 내수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일본에 수출하는 구상이었다. 2014년 본격 운영에 들어가면 불산 생산이라는 일차적 경제효과 외에 물동량 확보로 항만 활성화까지 잡겠다는 큰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해 9월 구미의 한 공장에서 불산 유출이라는 악재가 터졌다. 인재(人災)였지만 제1야당인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 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환경단체와 손을 잡고 조직적으로 전국적인 공장 반대 여론 조성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공기 중에 불산이 이미 다 날아갔다고 하는데도 당시 민주당 대선주자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사고 열흘 뒤 현장에 달려가 방독면을 쓰고 ‘목과 눈이 따갑다’는 SNS를 올렸다. 공장은 없던 일이 됐다.
공장이 들어서려던 광양항 서측 배후부지엔 지금 컨테이너만 가득하다. 현재 수출입 물동량 국내 1위이긴 하지만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물동량에다 저조한 고용 창출 효과 탓에 제조업 유치가 과제로 꼽힌다. 일본의 핵심소재 수출 규제로 중요성이 새삼 알려진 국가적 불산 확보 차원뿐만이 아니라 지역경제 측면에서도 그 시절 공장 무산은 이렇게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2012년엔 향후 100년은커녕 불과 7년 후를 내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최소한 정치권에선 그랬다. 맹목적 반대와 암묵적 동조, 그리고 과학적 근거가 취약한 선동이 합리적인 제안과 미래에 대한 우려를 압도했다.
실제로 성명에 언급된 광양 우윤근 의원(현 주러시아 대사)은 직접 이 전 사장에게 “철회하라”고 요구했고, 여수을 주승용 의원(현 바른미래당) 등의 경우 적극적 반대 행보는 없었지만 관련 보도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낙연 의원(현 총리)은 당시 성명 발표 자체를 몰라 부인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옆 동네 전북 군산 김관영 의원(현 바른미래당) 역시 “여수항만공사는 사업성 확보에만 치중해 지역민 안전을 간과하고 있다”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지역과 중앙 정치권이 숟가락을 하나둘 얹을 때마다 여론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혼자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서울 가서 이쪽저쪽 연락을 했는데 아무도 안 도와주는 기라. 그땐 국토부가 항만을 컨트롤했는데 도와주기는커녕 ‘다들 반대하는데 뭐 하러 하느냐’면서 ‘하려면 너 혼자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고. 정치인들이 무서웠던 건지, 이런 자리(공사 사장)가 원래 관료들 가는 자리인데 외부에서 갔으니 도와줄 생각을 안 했던 건지. 내가 져쁜기라. 순전히 정치 때문에 (공장을) 못한 기라.”
결국 그해 11월 28일 전면 백지화를 발표했다. 이 전 사장은 퇴진운동을 벌인 공장 건립 반대 세력에 휘둘리다 이듬해 공공기관장 평가에서 D등급을 받고 스스로 물러났다.
“나라가 도대체 이따구로 하는 게 어딨나. 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좋은 화학공장인데 그걸 알지도 못하면서. 나야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아이템(공장 설립)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깝다. 결국 일본에 가버리지 않았나. (※멕시켐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 36개국에 공장 137곳을 가동하며 직원 2만20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 이런 결말을 알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또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기다. (정치인은) 표 얻자고 또 반대할 것이고 그러면 아무리 필요해도 또 못 만드는 거 아니냐.” 그는 “이제 와서 이런 얘기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자꾸만 되물었다.
그 후로 7년이 지나 일본의 소재 무기화 위기에 맞닥뜨린 2019년, 문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와 여당은 모두 소재 독립을 외치며 불산 등 화학물질 생산 공장의 환경규제를 완화해 주겠다고도 한다. 불산 맹독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데 그땐 왜 반대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슨 근거로 입장을 바꾼 건지 설명하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이젠 정말 공장을 지을 수 있을까.
힌트를 얻고자 그 시절 불산공장을 반대했다고 알려진 정치인들 입장을 물었다. 우윤근 대사는 “당시 멀리 내다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반성은 아니었다. “광양은 포스코도 있고 해서 원래 환경단체 목소리가 센 지역이다. 지역과 아무 이해관계가 없다면 쉽게 말하겠지만 경제적 가치나 국가적 필요성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주민들보고 참으라고 하기는 어렵다.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 아쉬운 점은 있지만 그땐 국가에 시급한 일도 아니지 않았나.” 우 대사 말처럼 광양참여연대 등은 화학공장 추진마다 발목을 잡았다. 2012년엔 불산 공장 외에 포스코 화학공장 허가를 거부하라고 광양시장을 압박하기도 했다.
주승용 국회 부의장은 “지금 당하고 보니 꼭 필요한 공장이었는데, 내 지역구가 아니다 보니 어렴풋한 기억 말고는 당시 어떤 입장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1998년 여수시장 재직 당시 바스프(글로벌 화학회사) 공장을 유치했는데 시민단체가 독가스 공장이라고 반대해서 1공장만 짓고 예정됐던 2, 3공장은 중국으로 가버렸다”는 경험을 소개하며 정치인으로서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가장 격렬하게 공장을 반대했던 이정문 전 시의장은 대뜸 “한국에 불산 공장은 꼭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광양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때도 불산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다 알고 있어 객관적으로만 판단하면 공장 설립에 공감했다”면서도 “아무리 중요해도 인구 밀집이 광양보다 덜한 곳에 지어야 한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이낙연 총리는 공장 무산 후인 2014년, 불산 공장 철회를 주요 업적으로 내세운 이정문 전 의장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오래 같이 일해봐서 잘 아는데 우리 시대 지도자의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며 광양시민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공장 저지에 대한 암묵적 동의였는지를 묻자 이 총리 측은 “2012년 당시 이정문 전 의장은 물론 불산 공장 이슈 자체를 아예 몰랐다”며 “2014년 전남지사에 출마한 후 유세 중 이 전 의장을 처음 만나 요청을 받고 출판기념회에 갔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 시절 님비(Not In My back Yard) 현상과 조직력을 갖춘 시민단체의 반대 앞에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치인이 해야 할 조정 역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과연 달라졌을까. 24년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정치는 4류” 발언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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