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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문학적으로 보는 한국영토 독도의 영유권

한국일보 입력 2019. 08. 1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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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동해바다는 한일 양국의 국경지대였다. 동해의 한국 쪽에는 한국인이 사는 울릉도가 있었고, 일본 쪽에는 일본인이 사는 오키섬이 있었다. 그리고 울릉도와 오키섬 사이에는 큰 바위섬인 독도가 있다. 독도는 사람이 살수 없는 섬이었지만, 87km 지점의 가시거리에 울릉도가 있어서 울릉도 사람들이 왕래하는 섬이었다. 반면 오키섬에서 157km 떨어져있어 서로 보이지 않아 일본인들이 독도에 왕래하지 않았다. 섬의 영유권은 섬에 사는 사람들의 국적과 동일하다. 그런데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바위섬이지만, 울릉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섬이었기에 한국이 영유권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사람들은 언제부터 독도에 왕래하였을까? 또한 일본도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사람들은 언제부터 독도를 알게 되었을까? 독도의 인문학에 대해 설명해본다.

첫째, 고대와 고려시대에는 울릉도에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울릉도 사람들이 바라다 보이는 섬 독도에 자연스럽게 왕래하였기에 소유의식이 생겨났고, 국가도 영유의식을 갖게 되었다. 반면 오키섬에서 독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본은 소유의식조차도 없었다.

둘째, 조선 정부는 500년 내내 쇄환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워서 관리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1625년부터 1692년까지는 일본 어부들이 비어있는 울릉도에 70여 년간 몰래 왕래하여 울릉도 경제를 약탈해갔다. 이때에 도해한 일본인은 독도를 기항지로 삼았기에 독도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국가는 영유의식을 갖지 않았다. 반면 한국은 쇄환정책으로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고대, 고려시대를 계승하여 ‘우산도’라는 이름으로 독도에 대한 국가의 영유의식은 그대로 존재했다. 다만 쇄환정책으로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기에 ‘우산도’의 위치나 형상에 대한 오류가 생기기도 했다.

셋째, 1692년에서 1696년 사이 안용복사건으로 한일 양국 간에 울릉도, 독도의 영유권 분쟁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정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정하였고, 조선정부는 섬의 위치와 형상이 애매했던 독도의 존재를 확인하고 울릉도와 더불어 영토로서 관리하였다. 그후 1882년 조선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하기 이전까지 180여 년간 섬을 비워서 관리하여 울릉도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독도의 위치에 대한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는 1696년 막부가 도항을 금지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원래부터 일본영토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였기에 일본인들은 독도에 왕래하지 않았다.

넷째,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일본의 강요로 부산, 인천, 원산항이 개항되어 일본인들이 독도를 거처 울릉도에 들어갔고, 독도의 존재도 부각되었다. 한 일본어부는 1903년부터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했다. 이때 한국정부는 일본인들이 울릉도, 독도에 침입한 사실을 확인하고 1882년 이규원 검찰사를 파견하여 조사한 뒤 울릉도에 거주민을 이주시켰고, 1900년 칙령41호로 울도군을 설치하여 울릉도에 잠입한 일본인들을 퇴출시켰고, 울릉도 사람들은 독도에 왕래했다.

다섯째, 일본은 1904~5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 의정서와 제1차 협약을 강요하여 내정을 간섭하고 전시 중에 한국의 영토를 함부로 점유했고, 동시에 은밀한 방법으로 독도를 편입하는 형식으로 탈취해가려고 했다. 1년 후 시마네현 관리들이 독도를 거쳐 울릉도의 심흥택 울도군수를 방문하여 몰래 그 사실을 알렸다. 심 군수는 긴급으로 바로 이튿날 중앙정부에 보고했고, 한국정부는 통감부에 항의하여 일본의 독도 탈취 행위를 부정하고 독도의 영유권이 한국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여섯째, 일제 한국 강점기에는 시마네현 어민들이 독도에 왕래하여 강치를 모조리 포획하여 멸절시켰다. 이런 독도를 포함한 일제의 한국 강점은 연합국의 정책으로 불법임을 확정했다.

일곱째, 패전으로 일본을 강점한 연합국은 1946년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였고 한국어민들은 독도에 상륙하고 주변 바다에서 조업했다. 1948년 주일미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삼았고 오폭사건으로 한국어민 30명을 희생시켰다. 한국정부의 항의로 미국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고 피해를 보상했고, 일본인들은 독도와 주변 바다에 접근할 수 없었다.

여덟째, 1951년 대일평화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의 로비를 받고 연합국이 독도를 한국영토 인정했던 입장을 바꾸었다. 그러나 영연방국가인 영국, 호주. 뉴질랜드가 이의를 제기하여 최종적으로 양자는 ‘분쟁지역인 무인도는 법적 지위의 결정을 유보하고, 유인도는 신탁 통치한다’라고 결정하여 무인도였던 독도의 소속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52년 이승만대통령은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실효적 점유상태에 있던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선언하여 일본인들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아홉째, 1952년 평화선 조치에 항의하여 일본어민들이 독도 상륙을 시도했다. 이때에 1953년 울릉도 청년들이 독도에 상륙하여 이를 막았고 1954년에는 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처음으로 독도에 한국인이 상주하게 되었다. 그해 독도에 막사와 등대를 설치하였고 바위에 ‘한국령’ 표시를 새겼다. 1956년에는 정식으로 울릉경찰이 독도에 주둔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와 시마네현 주민들은 항의했다.

열째, 한일협정에서 국교를 맺는 과정에 일본정부는 독도영유권을 정식으로 해결하지고 주장했고, 한국정부는 독도가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라는 입장을 관철시켜 비밀협상으로 “현상유지” 라는 실효적 점유상태를 인정받았다. 2006년에는 일본 측량선이 독도진입을 시도하여 이를 후퇴시킨 후, 한국정부는 전적으로 관광객의 독도 입도를 허가했다. 현재의 독도는 주민, 관리공무원, 경찰 등 40여명의 한국 사람이 정주하는 한국의 영토이다.

이처럼 독도는 한국 사람들이 왕래한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고대시대 이후 줄곧 한국이 관할 통치해온 영토였다. 반면 유사 이래 일본사람들은 합법적으로 한 번도 독도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최장근 대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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