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대중 "일본 태도 시정 얻어야 양국 친선 튼튼한 기초 가능"

이지혜 2019. 8. 1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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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도서관 '김대중 전집 2부' 발간
최초 공개 사료서 살펴본 대일 인식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한일관계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면 이번 일본 수출규제로 인한 ‘한일 경제전쟁’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13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1948년부터 1997년 대통령 취임 이전까지의 기록 2015건을 담아 ‘김대중 전집 2부’를 출간했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김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 기록을 보면 냉철한 비판 의식과 따듯한 연대 의식을 동시에 갖춘 그의 대일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최근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재조명받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당시 한일 양국이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를 열어간다는 데 의견 일치를 이룬 획기적인 선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일 외교사상 처음으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공식 합의 문서에 명시됐을 뿐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한일 협력 방향도 제시됐다. 이는 김 전 대통령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대일 인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 우호 강조한 현실주의자

청년 김대중은 일본을 ‘손잡아야 할 이웃’으로 바라본 현실주의자였다. 정전협정을 체결하고도 동북아 지역에서 총성이 멈추지 않던 1953년 10월, 시사평론가 김대중이 발표한 <한일우호의 길>이라는 기고문에서 이 같은 대일 인식은 명확히 드러난다.

김 전 대통령은 기고문에서 “공산 침략으로부터 (한일) 양국 민족을 구하기 위해 일절의 난관을 극복해 양국민의 우호단합이 엄숙히 요청된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안보와 국익을 위해 “자유진영의 일원”이자 “태평양 반공동맹에서 같이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필수라는 태도다. 1964년 야당 정치인들이 박정희 정부의 한일 국교 정상화를 ‘매국’으로 몰아세우며 반대할 때에도 청년 정치인 김대중은 이런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물론 김 전 대통령이 바라는 국교 정상화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바로 일본의 태도 변화였다. 김 전 대통령은 기고문에서 “(일본의) 방만 무도한 태도마저 눈감은 채 악수의 손을 내민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 불허함은 물론, 양국의 우호 협조를 위해서도 결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일본의 옳지 못한 태도의 시정을 얻어야만 진실로 영원한 양국 친선의 튼튼한 기초를 닦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일우호의 길―상>(1953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오늘날 악독한 공산 침략에 직면하여 전 자유진영이 그의 생존을 위해서 굳게 단결하여야 할 차제(此際)에 지리적으로 순치(脣齒)의 관계에 있는 같은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겸하여 앞으로 조직될 태평양 반공동맹에 있어서도 같이 중추적 역활을 하여야 할 한일 양국의 반목 대립은 아주(亞洲) 반공세력의 강화는 물론 전기(前記) 반공동맹의 추진에도 치명적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단적으로 말해서 금일의 절박한 노예와 멸망의 공산 침략으로부터 양국 민족을 구하기 위하야는 일절의 난관을 극복하여 양국민의 우호단합이 엄숙히 요청되는 것이다.

(중략)

현재의 방만 무도한 태도마저 눈감은 채 악수의 손을 내민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 이를 불허함은 물론 양국의 우호 협조 그 자체를 위하여서도 결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바는 못 되는 것이다. 한일국교의 새로운 판국에 처해서 우리는 단호히 일본의 옳지 못한 태도의 시정을 얻으므로서만이 진실로 영원한 양국 친선의 튼튼한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것이다.

(<한일우호의 길―상>, 1953년 10월 2일)

일본 정치권에 진심 어린 충고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을 단순히 비판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뒤부터 1973년 8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도쿄에서 납치되기 전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입지를 전략적으로 인정하면서 일본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인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1월 일본 <주오고론>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아시아의 중심에 선 일본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일본에 책임감을 요구했다. 그는 “아시아 각 국민은 복잡한 눈빛으로 일본을 쳐다보고 있다. 일본은 자기들만 부자가 되면 된다고 생각할 뿐, 같이 살아가지 못하는 입장”이라고 일갈했다. 또 “일본은 아시아 각국에서의 민주주의 정착 및 발전이야말로 아시아의 미래를 결정짓는 기본 요건임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면서 ‘아시아 민주공동체’ 조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나는 과거 일본과 우리나라 간에 있었던 불행한 역사는 일단 놔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의 황폐화를 딛고 일어서 지금의 일본 국가를 건설한 일본민족의 끈기와 그 생명력, 그리고 성과에 대해 진심으로 높이 평가한다. 또 일본이 지금 아시아에서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입장에 서서 중국과 함께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실, 그리고 그렇다면 일본은 미국이 범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마음으로부터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본은 이미 그러한 징조를 보이고 있다. 나는 약간의 견해를 일본국민들에게 밝히고, 이것이 장래의 진로 결정에 조그마한 참고라도 되기를 바란다.

일본은 아시아 각국과 접촉할 때 현존하는 정권을 상대로 협력하는 경우에서도 그 근본정신은 어디까지나 “상대는 정권이 아니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고 바라는 국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략) 두 번째로 경제협력은 어디까지나 상대국 국민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끔 철저한 방향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세 번째로 아시아의 평화와 전쟁위기 해소를 위해 미·일·중·소 4대국에 의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일체의 분쟁과 대립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을 근절할 수 있도록 솔선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일본의 안보와 방위문제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 번째로 일본은 이미 소련 및 중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했고 각종 교류를 증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실적을 활용해 아직 중국, 소련 양국과 국교를 맺지 못한 각 나라들을 중개해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 아시아에서 공산권과 자유 제국 간의 집단적 평화공존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다섯 번째로 일본은 아시아 각국에서의 민주주의 정착 및 발전이야말로 아시아의 미래를 결정짓는 기본 요건임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자면, 가칭 ‘아시아 민주공동체’를 조직하여 각국의 의회 민주주의, 지방자치, 민주적 시민운동, 그리고 언론 자유의 발전과 올바른 경제협력, 각국 민간의 이해와 선의를 증대시키는 문화교류를 위한 공동의 방안과 협조, 이것들을 위한 적극적 노력을 선두에 나서 진행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아시아 각 국민은 복잡한 눈빛으로 일본을 쳐다보고 있다. 일본은 자기들만 부자가 되면 된다고 생각할 뿐, 같이 살아가지 못하는 입장에 놓여있다.‘아시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일본의 올바른 비전 확립은 ‘대국 일본’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한다.

(<조국 한국의 비통한 현실-독재정치의 도미노적 파급>, 1973년 <주오고론> 1월호)

김대중 친밀메모(1973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일본 양심세력 향한 애정도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김대중’은 한일 연대의 연결고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김 전 대통령이 1973년 8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대중 구명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보면 일본 내 양심적 세력에 대한 애정이 돋보인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옥중서신에서 일본국민에 대해 감사의 뜻을 밝히며 한일 양국 시민사회 차원의 교류를 일궈내자고 주장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나를 위해 수백만의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곳곳에서 데몬스트레이션(시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나는 얼마나 크게 고무되고 감사를 했던가”라며 “몇 겹으로 닫혀진 한일 양국민 사이의 문을 뜻있는 동지들과의 협력으로 하루 속히 열어 재껴야 한다”고 밝혔다.

<옥중서신> 일본어판 서문 친필 초안(1983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세계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일본국민이 뛰어나게 나를 위해 걱정하고 투쟁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이가 없으리라. 이는 그 지리적·역사적 관계로 보나 납치사건 이래의 사정으로 보아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나를 위하여 수백만의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곳곳에서 데몬스트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나는 얼마나 크게 고무되고 감사를 했던가! 일본의 모든 벗들은 내가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언제나 마음속에서 같이 있었다. (중략) 이와 같이 몇 겹으로 닫혀진 한일 양국민 사이의 문을 뜻있는 동지들과의 협력으로 하로속히 열어 재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만이라도 서로 이해와 협력 속에 화목한 이웃으로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다행히 나는 한국 사람 중 누구보다도 일본의 여러분과 특별한 인연으로 인하여 일본인과 서로 마음의 공감대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 보잘것없는 책이 그러한 목적을 위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옥중서신> 일본어판 서문 친필 초안, 1983년)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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