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에 목 감겨 '자살 누명' 쓴 하청노동자 '산재' 인정

김지환 기자 입력 2019. 8. 16. 14:47 수정 2019. 8. 16.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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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법원 “당일까지도 일상적 생활
ㆍ사고로 눈 잘 안 보여서 실족사”

조선소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고소차를 타고 도장 작업 전 선박 표면의 염분을 씻어내는 물청소 작업을 하고 있다. 금속노조 제공

정범식씨(당시 44세)는 1차 하청업체로부터 재하도급을 받아 일하는 조선소 물량팀 노동자였다. 10여년 경력의 ‘베테랑’이던 정씨는 2014년 4월26일 오전 8시부터 현대중공업 선행도장부에서 여느 날처럼 샌딩(선박 표면 철판의 녹 등 이물질 제거)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이 작업을 할 때 녹을 제거하는 데 쓰는 그리트(쇳가루)를 분사하는 샌딩기와 에어호스를 이용한다.

정씨는 오전 10시쯤 작업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작업반장에게 “샌딩기 리모컨이 자꾸 말썽”이라고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기 싫다”는 동료에겐 “컵라면 사왔으니 같이 먹자”고 하기도 했다. 평소 모습과 다르지 않던 정씨는 하지만 오전 11시35분쯤 동료의 작업구역에서 에어호스에 목이 감겨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정씨가 부부싸움을 했으며 정신과 진료내역이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자살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씨의 배우자 김모씨는 “남편이 자살했다는 누명을 썼다”고 반발했다.

김씨는 2015년 5월 근로복지공단에 정씨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라며 유족급여 지급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경찰 수사 결과를 근거로 “정씨의 사망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며 부지급 처분을 했다. 이에 김씨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 법원인 서울행정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의 부지급 처분이 적법하다고 보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항소심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등법원 행정5부(재판장 배광국 부장판사)는 지난 14일 “정씨는 샌딩기 리모컨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샌딩기에서 분사된 그리트가 눈에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고, 그로 인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사다리를 통해 내려가려다 바닥에 둥글게 말아놓은 에어호스에 몸이 감겼고 이후 실족하는 과정에서 호스가 목에 매여 사망한 것”으로 판단했다. 정씨의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한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정씨의 자살 가능성에 대해선 “사고가 일어난 곳은 정씨의 작업구역에서 떨어진 동료의 작업구역인데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굳이 타인의 작업구역까지 이동할 이유가 없고, 정씨가 사고 발생 전날까지도 배우자와 통화를 하고 사고 당일에도 동료들과 일상적 대화를 하는 등 자살의 동기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눈에 그리트가 들어간 사람이 높이를 가늠해 목을 매기는 어렵다”고 했다.

유족 측 대리인단은 “산재를 직접적으로 입증할 증거가 부족한 노동자는 소송에서 산재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이 판결이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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