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둥닝 요새의 '위안부 참상'

노도현 기자 입력 2019. 8. 1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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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중국 헤이룽장성의 관동군 주둔지에서 고초 겪은 할머니들의 증언

중국 상하이사범대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에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진이 전시돼 있는 모습. / 김영민 기자

2000년 5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의 3평 남짓한 방. 두 뺨이 발그레한 70대 할머니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박옥선 할머니(94)가 처음 피해사실을 증언하는 순간이었다.

중국 방직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았다. 1941년 고향 밀양을 떠날 때 17세였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대일 선전포고를 할 때까지 4년을 ‘아키코’로 살았다. 노래를 잘해 군사훈련 기간이나 명절 때면 위문공연을 다녔다.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장교들에게 치욕을 당했다.

위안소에서 불렀던 일본 민요의 기억은 또렷했다. 박 할머니는 듬성듬성 빠진 이를 내보이며 한 소절을 뽑았다. 하지만 자신이 머문 위안소의 위치를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 팔십이 다 됐는데 모른다. 큰 강은 못가봤지. 조그만 강에서 빨래 씻으니까 어디가 어딘지 모른단 말이지. 노는 날도 훈련한단 말이다 군대처럼.”

삼엄한 감시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곳. 소련과 맞닿아 있는 헤이룽장성 둥닝(東寧)의 천장산 요새 위안소였다. 2000년 박 할머니를 최초로 인터뷰한 왕중런(王宗仁) 둥닝요새박물관 연구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지난 8월 14일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역사적 과제’ 국제학술회의에서 국내 처음으로 둥닝 요새에서의 참상을 종합적으로 소개했다. 8월 13일 서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만난 왕 연구원은 “둥닝 요새 연구를 통해 위안부 관련 유물을 발굴, 확실한 증거물을 확보해 일본 정부가 죄를 인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병 29명당 위안부 1명”

둥닝 요새는 아시아 최대 군사요새이자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전쟁터였다. 일본 관동군은 1934년 6월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둥닝에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10여개 요새로 구성된 동닝 요새의 길이는 100㎞, 전·후방 거리는 50㎞에 달했다.

1941년 6월 관동군의 특별대훈련이 시작되면서 둥닝 국경을 따라 13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위안소도 대거 들어섰다. 왕 연구원에 따르면 당시 국경 진지 부근에 설치된 위안소는 50여곳이었다. 사병 29명당 여성 1명이 배정됐다. 현재까지 발굴된 둥닝 요새 위안소 유적지는 총 49곳이다. 위안소의 이름은 다양했다. 가장 흔한 건 ‘XX 위안소’. 안락소·오락소·군인회소·군인낙원·구락부·후방시설 등으로도 불렸다. 왕 연구원은 “마치 회사 이름을 짓듯 각 위안소에 이름을 붙였다”며 “둥닝 요새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운영됐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일본군이 전쟁에서 패하자 몇몇 부대는 위안부를 방치한 채 달아났다. 일부 일본인 위안부는 일본군을 따라 철수했다. 일본군은 다수의 여성들을 방공호로 끌고가 독약을 먹이거나 폭탄을 터뜨려 살해했다. 위안부가 소련군에게 일본군 내부 정보를 제공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왕 연구원은 설명했다. 1946년 6월 둥닝 정부는 위안부 2000명에게 일반인 신분을 부여하는 ‘신분 회복’을 실시했다. 대부분 조선인 여성이었다.

왕 연구원은 중국어로 빽빽한 원고지 3장을 내밀었다. 한국에 오기 직전 둥닝에서 고초를 겪은 고 김선옥 할머니 아들에게 받은 자필 진술서라고 했다. 김 할머니 아들은 진술서에 ‘어머니는 위안소에서 항상 일본군한테 매를 맞았고, 일본군이 코에 고춧가루를 들이부은 적도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썼다. 왕 연구원은 “김 할머니는 생전에 나와 인터뷰할 때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과거의 기억에 고통스러워 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 아들의 진술서는 또 다른 둥닝 요새 위안부 피해자인 이광자 할머니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왕 연구원이 공개한 이 할머니의 증언이다.

“군인들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정말 하고 싶지 않을 때, 관리인은 소금에 찍어 먹을 대파밖에 주질 않았어요. 밥 없이 무만 먹었죠. 더 고통스러운 건 못자게 하는 거였지. 무릎을 꿇고 고춧가루 탄 물을 마시게 했어요.”

박옥선 할머니가 2000년 5월 처음 피해사실을 증언하는 영상 캡쳐.

위안소 터에서 나온 단서들

진실은 일본군 전범의 자백에서도 드러난다. 한 관동군 간부는 중국 정부에 제출한 자백서를 통해 “군대 안에 위안소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렸다”며 조직적으로 위안소를 설치·경영한 점을 인정했다. 저우귀샹(周桂香) 중국 다롄이공대 교수가 관동군 자백서 1148건을 분석해보니 80.1%인 920건에서 전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진술이 나왔다. 조선 여성도 여러 차례 언급됐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민간업자가 한 것일 뿐 일본군의 개입은 없었다”고 부정한다.

왕 연구원은 위안부 관련 유적·유물 발굴도 일본의 사과를 얻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중국 연구자들은 둥닝의 위안부 터에서 빗거울, 로션, 콘돔, 피임약, 윤활제, 반짇고리 등을 발굴했다. 왕 연구원의 설득으로 한 연구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물 일부를 동북아역사재단에 기증했다. 왕 연구원은 “과거 일본군 소재지에서 발굴한 여성들의 화장품, 머리빗 등은 대부분 위안소에서 쓴 물건이라고 볼 수 있다”며 “현재 둥닝에는 중군 인민해방군이 많이 주둔해 있어 군부대를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지만 그 시설 내에도 유적이 존재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가운데 생존자는 단 20명. 왕 연구원은 8월 13일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 생존자인 박옥선 할머니와 19년 만에 재회했다. 왕 연구원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박 할머니는 2001년 영구 귀국해 여생을 보내고 있다.

“예전에는 노래도 불러주실 정도로 아주 정정하셨던 할머니가 침대에 누워 계신 걸 보고 만감이 교차하더라고요.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둥닝에는 한 명도 없고요. 한국 연구자들과 협력해 일본의 사과를 얻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계속 찾아나가야죠.”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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