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회피' 시대가 위험하다

주영재 기자 2019. 8. 1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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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투자심리 위축 전체 경제에 영향… ‘고성장·고위험’에서 ‘저성장·저위험’으로

8월 12일 한국금거래소에서 판매되고 있는 골드바와 실버바. 안전자산 선호심리가 강해지면서 금값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자 금보다 저렴한 은의 인기도 올라 시세가 급등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유럽중앙은행은 지난 7월 기준금리를 0%로 유지했고, 일본은행은 지난 4월 기준금리를 마이너스 0.1%로 동결하기로 했다. 각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경쟁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면서 돈을 풀고 있다. 하지만 돈은 실물경제로 흘러가기보다 금융과 부동산시장으로 유입돼 자산가치만 부풀리고 있다. 저성장이 고착화되면서 일자리가 줄고,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면서 극우세력이 부상했다. 트럼프와 아베, 브렉시트로 대표되는 정치 우경화는 보호무역주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정치와 경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다.

안전자산에 몰리고 기업투자 줄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역시 달러 가치를 낮추기 위해 금리인하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고 있지만 무역분쟁이 커질수록 달러 가치가 높아지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위험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안전자산을 찾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금의 가격은 지난 8월 13일 국내 현물시장에서 사상 최초로 1g당 6만원대를 돌파했다. 국제 금 가격도 상승세를 보여 지난 8월 7일 6년 만에 1500달러를 넘었다. 금값이 가장 높았던 때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11년 9월 5일로 약 1895달러였다. 경기불황 우려가 커질수록 금값이 올라가는 구조다. 엔화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정부 부채가 상당히 높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을 국내 투자자들이 갖고 있고,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유지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김유미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미·중 무역분쟁이 생각보다 장기화되고 있고 보호무역주의가 다시 불거지면서 글로벌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부분이 전반적으로 투자심리를 ‘신중하자’는 쪽으로 몰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위험회피 행동은 전체 경제를 더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 안전자산에만 돈이 몰리고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위축되면 자연스레 고용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고용을 통한 임금소득이 줄면 가계 소비지출이 나빠지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경제성장률은 더 낮아진다.

현재 금융시장이 구조적인 위험회피 상황에 있다는 진단도 있다. 전균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금융위기 이후 불안하지만 성장은 이어졌는데 이제 한계에 도달한 걸 느끼면서 지난해부터 미국 중앙은행도 금리를 올리려다 못올리고 있다”며 “신흥국도 성장률이 정체되면서 부양책을 쓰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오히려 금융시장에서 자산보호(위험회피) 성향을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뉴노멀’이나 ‘애브노멀’로 표현되는 구조적 저성장 상황이 금융시장의 위험지표인 변동성 상승으로 가는 국면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의 중국이다. 중국의 경우 가장 큰 골칫덩이인 기업부채를 줄이기 위해 최근 2~3년간 부채를 줄이는 ‘디레버리징’ 정책을 펴고 있다.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성장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성장률이 낮아지면서 금리인하 같은 부양책을 쓰고 싶지만 이것이 다시 부채를 높이고 부동산 가격을 앙등시킬 수 있어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전균 애널리스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속해서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떨어뜨리면서 시장을 부양시킨 것이 (변동성을 늘려) 구조적 위험회피 성향을 키웠다”며 “지난 10년간의 (저금리 혹은 마이너스) 정책은 쉽게 말해 약발이 다했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단지 이자율을 낮춰서 경기를 부양한다는 건 굉장히 안이한 생각이다. 한국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서는 주로 환율이 바뀌면서 금리효과를 다 흡수해 이자율이 그다지 거시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고성장·고위험’ 체제에서 ‘저성장·저위험’ 체제로 바뀌었다고 진단했다. 기업들은 이윤율 위주로 경영을 하면서 투자보다 유보금을 쌓는 의사결정을 많이 했다. 높은 위험이 따르는 투자보다 투자 기회를 관망하면서 위험을 피하려는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기업들이 돈을 쌓고 투자를 안 하는 건 투자 기회가 안 보이기 때문이다”라며 “과거 식으로 돌아갈 순 없고 국가 혁신체제를 만드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위험·고수익’ 기대 사회 만들어야

국가 혁신체제의 가장 큰 과제로는 사회보장제도 강화를 들었다. 이 교수는 “만들어서 실패해도 다시 올라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새로 뽑는 공무원이나 공기업 종사자에게는 호봉제 대신 직무급을 도입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정적이면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월급을 받는 이들 공공부문 일자리의 매력을 줄여야 민간으로의 진출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박상인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나타냈다. 민간부문이 공공부문에 비해 위험을 감내할 만큼의 ‘리턴’(보상)을 주지 않는 것이다. 박상인 교수는 “공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은 평균수익도 나쁘지 않고 위험도 적은 반면 사기업이나 혁신기업은 평균 기대수익이 상대적으로 낮은데도 그에 따른 위험은 굉장히 큰 상황이라 안정적 직종을 선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험에 대한 부분은 컨트롤 할 수 없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려면 (민간기업에 취업했을 때의) 보상을 키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민간부문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막는 구조다. 박 교수는 “서울대 경영대를 나와도 사기업에 취업한 경우는 거의 없다”며 “재벌기업의 ‘바지사장’이 되려고 위험부담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기술탈취와 전속거래가 만연해 성공했을 때의 보상을 보장받지 못한다.

공공 연구·개발 투자도 마찬가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 연구·개발 투자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기술 개발 성공률도 90%에 육박하지만 사업화 성공률은 낮다. 난이도가 낮고 사업화로 이어질 실용성이 낮은 기술만 개발하면 일본과의 무역분쟁에서도 주도권을 잡기 어렵다. 특허나 논문의 개수로 평가를 하는 상황에서는 실패의 위험이 있는 연구를 하기 어렵다. 결국 보상 혹은 평가기준의 왜곡이 위험을 회피하게 만든다.

박상인 교수는 “금융정책의 효과가 상당히 제한적이라 산업정책에서 기회와 유인이 많이 생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기술탈취를 막고 공정한 기회가 있는 경제구조로 바꾸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교성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충분한 사회적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위험부담을 감수할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에서 말하는 혁신적 포용국가가 가능하려면 혁신이 가능한 탄탄한 기본 바닥을 깔아야 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사회보장책을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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