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나온, 주주자본주의 시대의 종언

조계완 2019. 8. 2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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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표 CEO들 181명 성명
"주주이익 극대화가 전부는 아니다"
애플·아마존·펩시·월마트·GM..
납품업체·직원 등 이해관계자 배려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전환 선언

미 언론 "포용적 자본주의" 평가
단기적 이윤추구 탈피 의미에도
"구체적 행동계획은 결여" 지적도
미국 대기업 경영자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 멤버들. 앞줄 왼쪽부터 액센추어 노스 아메리카의 줄리 스위트,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브라이언 모이니핸, 애플의 팀 쿡, 오스틴 비스타 에퀴티 파트너의 로버트 스미스, 뒷줄 왼쪽부터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제너럴모터스의 메리 배라, 블랙록의 래리 핑크. <뉴욕 타임스> 누리집

미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180여곳의 최고경영자(CEO)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주가치가 기업이 추구하는 모든 목적이어서는 더 이상 안 된다”고 선언했다. 주주를 넘어 종업원·소비자·환경·지역공동체·거래납품업체 등 기업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 및 ‘지속가능한 이윤 창출’을 새로운 기업 목적으로 표방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전후 50년간 대기업 이사회를 지배해온 주주자본주의 철학이 퇴조하고, 새로운 법인기업 행동모델이 학술적 논의를 넘어 현실 기업에 정착될 수 있을지 촉각이 쏠린다.

19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 저널>(WSJ)과 <뉴욕 타임스>(NYT)에 따르면 애플·아마존·펩시·월마트·제너럴모터스(GM) 등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들을 대변하는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은 이날 ‘기업의 목적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라운드테이블은 성명문에서 “종래의 기업 목적에 대한 문구를 변경했다”며 “기업이 투자 등을 결정하고 행동할 때 단지 주주들을 위한 눈앞의 이윤 창출만 추구하지 않고 종업원과 고객, 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고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오랫동안 신봉해온 이념에서 주요한 철학적 전환”이라고 평가했다. 성명에는 애플의 팀 쿡,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브라이언 모이니핸, 제너럴모터스의 메리 배라, 블랙록의 래리 핑크, 제이피(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보잉의 데니스 뮬런버그 등 최고경영자 181명이 서명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우리는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위한 근본적 책무 이행을 공유한다”며 “납품업체와의 거래에서 공정하고 윤리적으로 대하고 지역공동체를 존중하며,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를 통해 환경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종업원에 대해서는 “공정하게 보상하고 다양성과 포용, 존엄과 존중을 추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주에게는 대차대조표의 단기 이익보다는 ‘장기적 이윤 창출’을 약속했다. 이 모임 회장인 다이먼(제이피모건 회장)은 “단기적인 주주가치 중시에서 벗어나 이해관계자들을 배려하는 경영철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기업·지역·국가 모두 장기적으로 번영하고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즉각 미국 언론들은 ‘지속가능한 부와 공정한 번영, 포용적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밝힌 선언이라고 의미 부여에 나섰다. 미국의 법인자본주의는 전후 두 세대 동안, 특히 21세기 들어 20년간 ‘오직 이윤 추구’ 및 단기 이익 경영철학이 휩쓸었다. 지난 50년간 월스트리트와 대기업 이사회를 지배해온 이 신조는 시장자유 원리를 주창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의 독트린으로,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무는 오직 이윤 증대에 있다”고 주창한 바 있다. 특히 사모펀드 등 이른바 ‘행동주의 투자자 세대’는 기업 이윤과 주가 상승을 위해 인력을 대대적으로 감축하라고 투자 기업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번 선언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이윤을 극대화한다’는 기존 노선을, 경제경영학 학술 논의가 아니라 현장의 거대 법인기업들이 직접 나서 “이제 수정하겠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뉴욕 타임스>는 “소득불평등 누적에 대한 대중의 불만 점증에 직면해온 최고경영자들이 기업의 목적을 바꾸는 행동에 나섰다”고 논평했다. 펩시 이사회 멤버인 대런 워커는 “주주가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우리가 미국에서 목도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한 신조”라며 “시카고 경제학파들의 이런 이데올로기는 시장 투자자들과 상법 논리, 그리고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의 뇌리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어 무너뜨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선언이 기업 행동철학의 대전환을 일으키는 방아쇠가 될 수 있지만 구체적인 행동계획은 결여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단지 상징적 구호와 레토릭이 아니라는 것을 기업들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며 “세금과 기업 개혁 조처를 회피하기 위한 불순한 목적의 선언에 그치면 안 된다”고 논평했다. 경제학자 로런스 서머스(전 미 재무장관)는 “성명에 이해당사자의 한 축으로 ‘정부’가 포함되지 않았다. 구속력 있는 수단이 없으면 공허한 선언에 그칠 공산이 크다”고 우려했고, 낸시 케인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어떤 기업이 실제로 기존 비즈니스 방식을 바꿀 것인지는 아직 의문”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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