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믿을 수 없어 스스로 살길 찾아"

김한솔 기자 2019. 8. 2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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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후쿠시마 피폭 피난민 가토 유코 모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정부의 대처를 믿지 못해 피난을 떠났던 가토 유코 모녀가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고 전까지만 해도 환경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가토는 현재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를 상대로 진행 중인 간사이와 규슈 겐카이 원전 소송의 원고가 되어 탈원전 문제에 앞장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정부 조치에 의문 품고 체르노빌 피해 등 공부 사고 난 지 한 달 만에 피난 한때 나는 설사, 딸은 코피 나중에 피폭 증상이라 여겨 딸은 이지메 안 당하려 후쿠시마서 온 것 숨기기도 환경운동 전혀 관심 없다 피폭 뒤 원전 위험성 체험 원전 소송 등 탈원전 앞장”

가토 유코(57)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피난민이다. 사고 당시 후쿠시마 시청에서 계약직원으로 일하던 그는 원전이 폭발했다는 사실을 하루 뒤에서야 알았다. 걱정은 됐지만 ‘여긴 60㎞ 정도 떨어진 곳이니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정부도 반경 60㎞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겐 대피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지 지형인 후쿠시마시의 방사선량은 사고 전의 600배까지 수치가 올라갔다.

그는 어느 날부턴가 밤만 되면 이유 모를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방사능 구름’ 같은 단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안전할까’ 의문이 든 가토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체르노빌 보고서까지 찾아 읽으며 공부를 시작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반경 300㎞까지 고선량 지대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 피난을 떠났다. 사고 발생 한 달 만이었다. “300㎞ 이상은 떨어진 곳으로 가자”고 결심한 그는 9살 딸의 손을 잡고 오사카를 거쳐 교토에 정착했다.

경향신문은 ‘핵없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후쿠시마·한국 청소년 교류’ 행사 참석 차 다른 후쿠시마 주민들과 함께 한국을 찾은 가토 모녀를 지난 21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당시 9살이었던 딸은 이제 대학교 1학년이 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까지만 해도 환경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가토는 지금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를 상대로 진행 중인 간사이와 규슈 겐카이 원전 소송의 원고가 되어 탈원전 문제에 앞장서고 있다. 모녀가 도망치듯 떠난 지역에서는 내년 도쿄 올림픽 경기가 열린다. 다음은 가토 모녀와의 일문일답.

- 사고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정부는 ‘외출을 자제하고, 외출 시 입었던 옷은 버리거나 바로 벗고 샤워를 하라’는 안내만 했는데, 대형 지진이 난 뒤 전기·수도·가스가 다 끊긴 상태였습니다. ‘물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샤워를 하라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급수차 앞에 줄을 서서 2시간 동안 기다려 물을 받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가게를 전전해야 했으니 방사선량이 올라가는 상황에서도 외출을 자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밤만 되면 설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직접 방사능에 대한 자료를 찾아 공부를 하셨다고요.

“(처음에는) ‘우리 동네에는 방사능의 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는 방사능이나 원전에 관한 정보와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해외에 사는 지인이 보내준 원전 자료와 인터넷 링크들을 찾아 읽다가 피폭을 당해 병을 얻는데 역치(생물체가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 세기)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역치가 없다면 멀리까지 피난하는 게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됐습니다. 당장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재민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었어요. 오사카는 이재증명서가 없어도 받아준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가재도구를 다 버리고 최소한의 옷과 딸아이의 학용품만 챙겨 둘이 떠났습니다.”

-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은 왜 함께 가지 않았나요.

“처음에 가족들은 ‘정부가 괜찮다고 하는데 왜 피난을 가야 하냐’며 반대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고 하셨고, 남동생 가족은 산소를 지켜야 하는 책임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병으로 누워 있는 가족이 있거나 여러 상황들 때문에 피난을 가고 싶어도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딸도 처음에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다며 가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 오사카 생활은 어땠나요.

“제가 이사 간 곳에 다른 피난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부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을 이유로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정보 교환을 할 사람이 없어 고립됐어요. 집 제공 외에는 어떤 지원도 없었습니다. 날마다 ‘정말 내가 피난을 잘 온 것인지’ 하는 생각에 불안했습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가토의 딸은 한동안 눈물을 쏟아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후쿠시마에서 온 아이들이 이지메(왕따) 당한다는 소문을 들어 누군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면 ‘후쿠시마’라고 하지 않고 ‘동북지역에서 왔다’고만 말했다”면서 “나는 그냥 후쿠시마에 살았을 뿐인데, 나 자신을 감춰야 하는 게 너무 괴로웠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말을 할 때마다 친구의 표정이나 눈빛을 살피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에서는 ‘방사능이 전염된다’는 헛소문 때문에 한동안 번호판에 후쿠시마라고 찍혀 있는 차량을 가진 사람은 호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 설사 같은 증상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돌이켜보니 저녁이 되면 반드시 설사가 났습니다. 이상한 게 배가 아프지 않은데 설사를 했어요. 딸은 오사카로 간 직후 코피가 멈추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때는 방사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교토의 우리집 앞에 피난 온 남자아이는 코피가 멈추지 않아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습니다. 피폭증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지금은 증상이 없나요.

“지금은 없지만, 저선량 피폭은 증상이 바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 없다고 해도 앞으로도 계속 안 나타날 거라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정기 검진이 중요합니다. 다른 피난민들은 검진에서 갑상샘 결절이나 작은 혹이 발견돼 ‘요관찰’ 진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탈원전 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 원전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계시다고요.

“원래는 환경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가 되고 나서 원전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거리연설도 하고, 왜 핵발전소가 안되는지 재판에서 진술하기도 합니다. 언제 후쿠시마와 같은 사고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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