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은 '불편한 진실' 아닌 '불편한 허구'다

2019. 8. 2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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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반일종족주의'에 반박한다 ①식민지근대화론

일제강점기 소득불평등 심화
개발이익 일본인에게 집중돼
조선인들은 여전히 굶주렸고
해방뒤 오랫동안 가난 시달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쓴 <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을 부르고 있다. 이 책은 10만부 가까이 팔리며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일제는 조선을 수탈하지 않았다” “강제징용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등의 극단적 주장들이 유포되어, 정부 고위공무원이 “친일하는 게 애국”이라고 말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식민지 근대화론,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에 관해 각 분야 전문가의 기고를 3회에 걸쳐 싣는다.

허수열 충남대 명예교수

글·허수열(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2005년 4월, 일본의 극우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케이신문의 자매지 <세이론>(正論)이라는 잡지에 한승조 전 고려대 교수(정치학)가 ‘친일행위가 바로 반민족행위인가?’라는 기고문을 실으면서 한국이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당시 제정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이런 기고문을 쓴 직접적인 계기였다. 일부 신문에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는 축복’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함으로써 한 교수는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다. 그의 주장 속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특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래서 이영호 인하대 교수(사학과)는 이것을 ‘식민지 근대화론의 커밍아웃’이라고 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잊을 만하면 한번씩 튀어나와 염장을 지르는 것 같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쓴 <반일 종족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보수 우파들 기본 생각과도 어긋나는 내용”이라고 하였고,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책을 읽는 동안 심한 두통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 이 책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의 보편적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다.

일본 식민지 시기 조선 소년들이 만든 가마니를 파는 시장의 모습. 당시 학교에선 가난한 학생들한테 가마니를 짜 학비를 보충하도록 하는 아동 강제노역을 시켰다. 조선총독부는 쌀 수탈을 위해 가마니 짜기를 촘촘하게 계획, 관리했다. 출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사진으로 보는 서울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당당하다. 비록 그것이 ‘불편한 진실’이겠지만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적 양심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승조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도 높은 학문적 수준을 가진 학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가지고 주장하지, 감상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용어는 국사학계에서 들씌운 프레임 같은 것이라고 하여, 정작 식민지 근대화론자 본인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본인들이 자기들의 학문사조에 대해 달리 뭐라고 규정하지 않아 편의상 그 용어를 그냥 쓰도록 하겠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다양한 연구자들의 집합된 생각이다. 연구자들의 전공도 경제학뿐만 아니라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등 아주 다양하고, 연구 대상 시기도 조선 후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공통분모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고, 자칫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는 있지만, 시기별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핵심적인 주장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 후기 사회가 생산력의 붕괴와 더불어 자멸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②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으로부터 근대적인 여러 제도가 도입되고 선진적인 자본이 대거 투입됨으로써 조선이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인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③ 이러한 식민지적 개발의 경험과 유산이 해방 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철도·도로 확충에 경지·생산성 확대

식민지 근대화 근거 제시하지만

소득분배 독점·불평등 확대 재생산

일제강점기의 자료들을 들여다보면 그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괄목할 만한 개발이 이루어진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근대적인 일본의 법이 조선에 적용됐다. 시장제도가 발전했다. 철도·도로·통신·항만 등의 사회기반시설이 확충됐다. 선진적 기술을 가진 일본의 자본이 대거 투입되어 공장과 광산이 건설됐다. 하천이 개수됐다. 농지개량과 농업개량에 의해 경지면적이 확대됐고 농업생산성도 올라갔다. 도시계획과 상하수도 시설이 보급됐다. 이런 증거들은 이밖에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차고 넘친다.

불편한 진실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이런 근대적인 여러 변화가 식민지 조선을 개발시켰을 것이고, 그 개발 덕분에 조선인들도 좀 더 잘살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 ‘일본인들이 개발의 이익의 많은 부분을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조선인에게도 떡고물이 좀 떨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조선인들도 조금은 더 잘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이 개발되었다는 것으로부터 그것이 조선인에게도 이득이 되었을 것이라는 논리 전개 속에는 논리의 비약이라는 함정이 있다. 조선이라는 지역의 개발과 조선인의 개발을 구별하지 못하는 비약이다. 일본인들은 맹렬한 속도로 조선의 토지를 장악해 갔고, 광공업 자산은 90% 이상이 일본인들 소유였다. 소수의 일본인들이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을 집중적으로 소유했기 때문에, 소득분배가 민족별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평등한 소득분배 구조는 일본인들한테 더 많은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소득불평등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민족별 불평등의 확대재생산 과정이 식민지시대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던 개발의 본모습이었다.

불평등한 개발은 민족 차별을 확대시켰다. 조선의 개발은 일본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기 때문에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조선인들은 그러한 개발의 국외자에 불과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확대되는 이른바 ‘식민지적 경제구조’에 갇히게 되었다. 따라서 식민지 체제가 청산되지 않는 한, 조선인들은 식민지적 경제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해방이 바로 이 식민지적 경제구조에서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민족독립운동이 무엇보다 중요하고도 소중했다. 필자가 이전에 썼던 책에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일견 형용모순된 제목을 붙인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필자의 말이 반일종족주의의 도그마를 벗어나지 못한 극단적 주장으로 들리는가? 필자는 오랫동안 식민지 근대화론이 장기로 삼는 바로 그 실증이라는 것으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논쟁을 무수히 벌여 왔다. 지면의 제약 때문에 여기서 그 많은 실증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많은 실증적 논쟁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지표를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 보기로 한다.

‘강점기 조선일들 키 커졌다’ 는 주장

지난 100여 년 식품수급표 통계엔

1918~1945년 영양 공급량 감소세

소득 증가했다는 명제 성립 안돼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에서 이루어진 개발의 결과, 조선인의 삶의 질도 높아졌다’고 주장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의 키가 커졌다’는 주장도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의 하나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필자 가운데 한 명인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0% 이상 증가했고, 1인당 소비도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주장인데, 이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라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 과연 이런 주장이 타당할까?

육소영 충남대 박사는 1910~2013년의 식품수급표를 이용하여 조선(한국)의 1인 1일당 영양 공급량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식품수급표를 1962년 이래 현재까지 매년 공표한다. 육 박사는 식품수급표가 존재하지 않는 1910~1962년에 대한 식품수급표를 추가하여 그 시계열을 1910년까지 끌어올렸다. 이 식품수급표로부터 1인 1일당 에너지, 단백질, 지방질, 무기질(Ca, Fe), 비타민(A, B1, B2, Niacin, C) 등의 영양 공급량을 알 수 있다. 에너지, 단백질, 지방질 등의 주요 영양 공급량을 중심으로 그 분석 결과를 정리해 보면 다음 그래프와 같다.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1918년까지는 영양 공급량이 증가하다가, 그 후 1945년까지는 감소 경향을 보이며, 해방 뒤 반전하여 뚜렷한 증가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에너지 공급량과 단백질 공급량이 거의 정체해 있는 것은, 이 시기가 되면 다이어트가 주요 관심사로 될 정도로 영양 공급이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의 소득은 매우 낮은 상태였다. 이 기간에 조선인들의 소득이 증가했다고 가정해 보자. 낮은 소득 때문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기, 즉 항상 배가 고프던 그런 시기에는 소득이 증가하면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먹을 것을 찾을 것이고, 음식물 소비량이 늘어날 것이다. 영양 공급량이 증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프를 보면 일제강점기 동안 영양 공급량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소득이 증가했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키는 길게는 스무살까지 커지다가 그 이후에는 성장을 멈춘다. 키와 성장기의 영양 공급량 사이에는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성장기에 잘 먹으면 그러지 못한 경우에 비해 평균 키가 더 커진다. 일제강점기에 영양 공급량이 감소했다는 것은 평균 키가 커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연구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유의해야 할 점은 1918년까지의 증가 경향이다. 필자는 이 증가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된 직후의 초기 통계가 갖는 문제점 때문이며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동시에 이 기간의 경제성장을 둘러싸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미 수많은 논쟁을 벌여왔다. 결론적으로 말해 1910~1918년 동안에도 영양 공급량은 감소하거나 정체했다고 보아야 옳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의 주장을 못 믿겠다면, 쟁점이 되는 기간을 논외로 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더라도 결론은 큰 차이가 없다.

어떤 한 나라의 생활조건을 물질적인 소비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예컨대 부탄과 같은 나라는 소득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행복지수는 매우 높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하여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행복을 운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든가,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등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해방 후 한국은 소득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의 하나였다. 해방 후 오랫동안 보릿고개라는 말이 없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늘 굶주림에 시달리던 나라이기도 하였다.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 같지만 필자가 살면서 경험하였던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렇게 많은 개발이 이루어졌다면, 해방 후 한국이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위의 그래프와도 정합적이다. 이것이 팩트 아닌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불편한 진실’은 ‘불편한 허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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