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길 먼 소재부품 국산화 ①] 소재·부품 개발해도 상용화 안되는 한국

원호섭,안병준 2019. 8. 2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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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中企→대기업
생태계 연결고리 끊어져
소재개발 96% 성공에도
사업화는 46%로 '추락'
정부, R&D 5조 투입하기로
'R&D 핵심품목' 100개 키운다
"현장선 예산쪼개기 그치거나
단기성과 급급땐 또다시 실패
한두 개라도 스타품목 집중을"
경기도 시화공단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 중소기업 A사는 7년 전 전기자동차의 모터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을 독자 기술로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 부품은 일본 기업에서 관련 특허를 독점하고 있어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A사는 정부의 핵심 부품 기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원받아 2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기술장벽을 뛰어넘은 A업체의 국산화 노력은 일본 업체의 가격 공세에 수포로 돌아갔다. 이 부품을 독점 공급해오던 일본 업체가 기다렸다는 듯이 국내에 기존 단가 대비 20~30%가량 낮춰 공급한 것. A사 부품을 사용하기로 했던 국내 자동차 업계는 일본 업체의 파격적인 가격 후려치기에 결국 기존 부품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A사 대표는 "개발비만 날렸다. 사실 대기업은 우리가 국산화에 성공하는 바람에 일본의 부품 단가가 30% 싸진 건데 우리에게 개발비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핵심 부품·소재산업은 사실상 글로벌 업체들의 격전지이기 때문에 단순히 중소기업이 개발해 국내 대기업이 써주기만을 바라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에서 반도체 제조장비를 만드는 B사 대표는 솔직히 일본·독일 등과의 기술력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고개를 떨궜다. 반도체 기술은 계속 발전하는데 중소기업의 힘만으로는 기술 발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이에 반해 일본 장비업체는 새로운 장비를 지속적으로 대기업에 제안하기 때문에 결국 시장을 독점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B사 대표는 "한 단계 국산화에 성공해야 다음 단계 기술 축적으로 이어지는데 지금 산업계는 '국산화 장비를 썼다가 공정이 잘못되면 누가 책임지냐'는 풍토가 깔려 있다"며 "누가 큰돈을 투자해 국산화에 뛰어들겠느냐"고 반문했다.

28일 정부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소재·부품 분야 연구개발(R&D) 지원 시스템을 강화하기로 발표했다.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확정된 '소재·부품·장비 R&D 투자전략 및 혁신대책'은 부품·소재 분야 100여 개를 '핵심품목'으로 지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내년부터 3년간 5조원의 예산을 투자한다는 것이 골자다. 부품·소재 분야에서 취약한 '100개+α' 리스트를 확보한 뒤 각 수준에 맞는 R&D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다. 핵심 품목 분야에는 올해 1조원을 시작으로 예산이 투입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 개발→판로 확대→기술 축적'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잇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소·벤처기업의 정부 R&D 과제 성공률은 96%에 달하지만 이를 실제 제품으로 연결하는 사업화 실적은 46%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과학계나 산업계 모두 예산 나눠 먹기에 급급해서는 곤란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심승일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은 "단기 성과에 급급한 생태계 구조가 국산화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라며 "정부가 소재·부품산업 육성을 위해 장기간에 걸쳐 R&D 투자와 규제 개선, 판로 확보 등을 한꺼번에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김성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대학과 출연연, 중소·중견기업, 대기업 간 부품·소재 R&D의 끊어진 생태계를 연결하기 위해 기초·원천 R&D 기획에 산업계 수요를 적극 반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수요 기업(대기업)이 먼저 제안한 부품·소재 품목의 경우 중소기업이 해당 R&D를 진행할 때 기존에는 정부가 최대 2년 10억원을 지원했는데 내년부터 3년간 24억원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대폭 확대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런 예산 투입을 통한 부품·소재 국산화 작업은 2001년 소재·부품 특별법까지 제정해 가면서 20여 년간 해왔던 방식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진행됐던 부품·소재 국산화 전략과 차별성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김 본부장은 "이번 대책은 핵심 품목별 전략적인 투자와 함께 주력 산업의 기초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만큼 과거 대책과는 다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책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소속으로 핵심 품목을 관리하는 민관 공동의 '소재·부품·장비 기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시급한 품목에 대해서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과제 신속 추진을 위한 제도화 등을 통해 R&D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예산 쪼개기나 단기적 성과에 급급하다 보니 기술 난도가 낮은 범용제품 위주로 국산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며 "강소기업 100곳을 키우는 것보다 1~2개 품목이라도 장기간 기술 개발을 요하는 핵심 소재·부품에 집중해야 진입장벽이 높은 일본 기업과 경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호섭 기자 / 안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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