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의 시선] 거짓말 교육 그만합시다

이상언 2019. 8. 29.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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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 자소서 작성을 권하는 사회
"수시가 경제력 영향 적다"도 허위
조국 사태가 위선 탈출 계기 돼야
이상언 논설위원
대졸자들, 혹시 잊었다면 기억을 되살려 보십시오. 고교 졸업 무렵에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동창에게도 너 왜 그 대학, 그 학과를 택했느냐고 묻지 않으셨죠? 최상위권 대학의 인기 학과에 가는 친구에게는 물을 이유가 없었고요(‘상위권’과 ‘인기’가 답이죠), 이름이 생소한 학교나 학과로 진학하게 된 친구에겐 ‘안물안궁’의 태도가 예의였을 것입니다. 대학교 환영회에서 지원 동기를 묻는 고약한 선배에 대한 이심전심의 답은 ‘적성(적당한 성적)’ 아니었던가요?

수시 전형으로 대학에 가는 학생이 내는 자기소개서(자소서)의 최근 양식엔 질문 네 개가 있습니다. 대개 마지막 항목은 왜 이 학교의 그 전공을 골랐느냐는 것입니다. 지원자들이 솔직히 쓴다면 ‘나의 내신·스펙으로 합격이 가능할 것 같은 학교·전공 중 취업이나 진학(로스쿨 등으로의)에 가장 유리할 것 같아서’가 흔한 답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소서 쓰고 대학에 갔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무모한 솔직함을 고집하는 학생이 많지 않고, 설령 초고가 그렇게 쓰였다고 해도 부모나 교사 또는 ‘자소설 전문 작가’가 걸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지원 동기는 ‘다큐멘터리를 본 뒤 이 전공에 흥미를 갖게 되어서’ ‘해외 생활 경험을 통해 이 영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등으로 다시 작성됩니다. 그리고 자소서 앞부분에 적어야 하는 학교생활과 비교과 활동에 대한 설명도 지원 동기와 일맥상통하게 ‘포장’됩니다. 보통의 자소서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모든 학생이 거짓 자소서를 낸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학생들이 허풍 자소서 작성을 강요당하는 현실을 말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나름 뜻을 품고 학교생활을 하고, 그 소신에 따라 대학에 지원한 학생도 분명히 많을 것입니다.

수시 전형에서 지원자는 같은 학교의 여러 전공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진한’ 부모들은 이런 걱정을 합니다. ‘같은 학교에 내는 것인데, 한 자소서에는 국가 경제 발전에 관심이 많다고 쓰고, 다른 자소서엔 문학 소년이라고 쓰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대학들은 입시 설명회에서 한 지원자가 낸 여러 자소서를 한 데 모아 비교하지는 않는다고 부모들을 안심시킵니다. 친절하게도 말이죠.

수시 전형 확대가 사교육비를 줄인다는 것, 거짓말일 가능성이 큽니다. 진실이라고 입증된 적이 없습니다. 통계는 오히려 수시 모집이 늘어난 뒤 사교육비가 불어난 것으로 나옵니다. 수시 확대가 사교육비 증가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과 관계를 의심해 볼만은 합니다. 수시 때문에 교육비가 더 든다고 주장하는 교사와 학부모가 많습니다. 학교 시험 맞춤형 과외와 스펙 갖추기에 큰돈이 든다고 합니다. 일반 학원 수강료는 상대적으로 싸고, 온라인 수업도 있기 때문에 정시 준비에 오히려 경제적 부담이 적다고 말합니다. 수시가 장점이 많은 제도이고, 시험 한 번으로 대입이 결정되는 현재의 정시가 세상 변화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시가 사교육비 대기 어려운 저소득층 자녀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 데 들일 힘이 있다면 정시 개선에 써야 합니다.

외국어고나 자사고도 참과 거짓을 헷갈리게 합니다. 외국어 특화 교육을 받기 위해, 특정 학교의 자율적 교육 이념과 방침 때문에 그 학교에 가는 학생이 많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비평준화고’라는 명칭으로 분류하는 게 솔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 학교를 없애느냐, 마느냐는 현재의 평준화 제도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외국어고나 자사고라는 명칭은 정치권·교육계가 감당하기 어려운 평준화 제도 유지 또는 파괴의 선택 문제를 덮어두는 가림막으로 보입니다.

일본 교토대의 오구라 기조 교수는『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에서 한국인은 말로는 도덕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실제 행동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다고, 뼈 때리는 주장을 합니다. ‘이중인격’이라는 것이죠. 학생들은 외국어 특성화를 목표로 내세운 학교가 입시 교육에 치중하는 것을 보고, 수시가 정시보다 계층적 혜택이 없는 입시라는 수긍하기 어려운 말을 들으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대학에 갈 때는 거짓 또는 과장 자소서 작성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배웁니다.

자녀 진학 과정의 베일이 벗겨지며 드러난 조국 교수의 이중적, 위선적 행태를 ‘악(惡)의 평범성’을 내세워 변호하려는 게 아닙니다. 조 교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이끌 자격을 잃었습니다. 이 난리가 ‘위선 대물림’의 국가적 악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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