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보복, 20년 잠자던 중소기업 기술독립 할 기회"

윤태석 2019. 8. 31.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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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주최 ‘경제주권을 말한다’ 토론회

30일 서울 장충동 반얀트리호텔에서 열린 한국일보 주최 ‘경제주권을 말한다’ 토론회. 1부 ‘산업주권’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촉발된 한일 경제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반도체, 정보기술(IT) 등 핵심 분야에서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제분업체계까지 파괴하면서 한국을 도발한 일본에 맞서 이 참에 소재ㆍ부품ㆍ장비의 국산화 비율을 높이고, 기술 자립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이에 한국일보는 30일 서울 중구 반얀트리 호텔에서 ‘경제주권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전문가 토론회를 열었다. 세계중소기업학회장을 역임한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의 사회로 ‘산업주권’을 논한 1부 토론회에서는 이홍배 동의대 무역학과 교수가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 전략검토’를 주제로 기조발제를 맡았다. 토론에는 김동열 중소기업연구원장, 대한상공회의소의 싱크탱크인 SGI(지속성장이니셔티브)의 연정인 연구위원, 김영태 중소벤처기업부 기술혁신정책관이 참여했다. ‘데이터주권’을 다룬 2부에서는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와 김현경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가 토론을 벌였다.

기조발제를 하고 있는 이홍배 동의대 교수. 서재훈 기자

이홍배=소재ㆍ부품ㆍ장비 분야에서 한일 간 기술격차가 발생한 요인을 살펴보면 한국은 철저히 대기업 의존형이었던 반면 일본은 기술경쟁력 의존형이었다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1970~80년대 정부 주도 하에 가공 조립산업 중심의 정책을 펼치다 보니 대ㆍ중소기업 간 종속적 계열화가 고착됐다. 소재ㆍ부품ㆍ장비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대내적으로 정부와 기업 등 산관학연 각각의 역할과 책임, 경험과 노하우, 네트워크와 인력, 연구와 기술 역량을 하나로 통합하는 집약화 프로젝트가 절실하다. 정부 부처의 지원 사업 체계를 일원화하는 전담기관을 마련한 필요도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소기업들이 국내 대기업과 협력, 거래를 넘어 글로벌 기업과의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글로벌 가치사슬 안에서 ‘퍼스트원’ ‘퍼스트 무버’로 성장해야 한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 서재훈 기자

사회자=한국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두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대기업의 글로벌화가 이뤄졌다. 17개의 재벌이 사라졌지만 새 대기업이 만들어졌다. 2009년 금융위기가 오면서 중견기업이 글로벌화 됐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중소기업이 변화할 만한 일은 없었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기술독립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막연한 걱정을 넘어 구체적인 해결책 제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동열 중소기업연구원장. 서재훈 기자

김동열=1989년 일본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가 한국 경제를 ‘가마우지’에 비유했다. 한국 경제가 목줄(부품ㆍ소재 산업)에 묶여 물고기(완제품)를 잡아도 곧바로 주인(일본)에게 바치는 구조라는 이야기였다. 1999년에는 또 다른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가 한국은 부품 산업을 육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율 하나에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가 달려있는 취약한 나라라고 했다. 이게 자극이 돼 2001년 ‘소재부품 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졌다. 2003년 일본 통산성은 ‘타도 삼성’이라는 부제가 붙은 ‘히노마루 반도체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일장기를 뜻하는 ‘히노마루’를 붙인 건 일본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라는 의미였다. 최근 일본의 무역보복은 두 번째 ‘타도 삼성’의 기치를 내건 것이라고 본다. 지난 8월 일본 수출 규제에 대응하는 종합 대책이 나왔다. 2001년부터 시작해 10여년 추진하다가 흐지부지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이번 정책은 20년 이상 일관성과 지속성을 갖고 추진돼야 한다. 우리도 잠재력을 가진 기업들이 충분히 있다. 대기업들이 글로벌 소싱에만 치우치지 않고 국내 우수 중소기업과 상생협력, 산학연 공동기술 개발, 테스트베드 개방 등에 나서면 우리도 소재강국, 부품대국이 될 수 있다.

연정인 대한상공회의소 연구위원. 서재훈 기자

연정인=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 이후 국내 기업 뿐 아니라 해외의 연계 기업들도 위기감과 절박함을 호소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글로벌가치사슬 구조가 변화하고 경쟁질서가 새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핵심부품을 국산화하는 것과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미래 소재를 개발하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둘은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상업화한다는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글로벌가치사슬에 참여하는 기업은 전혀 다른 역량과 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산화를 위해서는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중소, 중견기업 제품을 위한 테스트베드가 우선적으로 구축돼야 한다. 반면 세계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기업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산학연 연계를 통해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신제품, 신산업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김영태 중소벤처기업부 기술혁신정책관. 서재훈 기자

김영태=정부의 기술개발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로서 말하겠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의 제조 생산 역량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세상이 변했다. 4차 산업혁명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굉장히 혁신적인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척해야 한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일본의 무역보복을 자극 삼아 새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앞으로 분업적 협력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중소기업이 일방적으로 지원 받아 개발한 제품을 국내 대기업, 글로벌 기업이 구매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중기부는 중소기업에 연구개발(R&D)부터 사업화 자금, 판로까지 패키지로 지원하는 정책에 주안점을 둘 것이다. 대기업들, 특히 글로벌 네트워킹을 갖춘 기업들도 중소기업과 기술 공동 개발에 많이 참여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역량을 강화하려면 R&D 자금 투입 뿐 아니라 생산 공장의 스마트화도 굉장히 중요하다.

2부 토론회에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원유’로 불리는 데이터가 다뤄졌다. 얼마나 많은 양질의 데이터를 빠르게 축적하고 빅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고도화된 인공지능(AI) 기술을 도입하느냐가 향후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전망이다. 패권 경쟁을 치열하게 펼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데이터 주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데이터 주권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초고속 유무선 인프라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양의 데이터가 생산되고 있음에도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외국 기업으로 데이터가 흘러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다. 한 발 뒤처진 승부를 따라잡고 글로벌 데이터 시장 주도권 싸움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문가들의 진단이 이어졌다.

2부 ‘데이터 주권’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상배 서울대 교수. 서재훈 기자

김상배=주권은 법적, 정치적 권리를 만들면서 생겨난 근대정치의 전형적 산물로, 흔히 국가주권을 떠올리기 쉽지만 데이터에 관해선 단순히 국가주권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특히 중국처럼 국내에 진입한 해외 기업들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주권을 정립하는 건 우리나라 상황과 맞지 않다. 개인정보 등 개인이 주체가 되는, 시민주권 개념으로 접근하는 유럽 방식이 더 적절하고 또 정교하다. 국가는 이 시민주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데이터가 적절하게 관리되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가의 권리를 앞세우기 보다는 데이터를 생성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극대화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김현경=인구 5,000만명의 한국이 데이터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제도와 규범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현재 국회에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사업자에 국내 서버 설치를 의무화해 데이터가 우리 영토 안에서만 유통되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는데, 이런 방식은 극단적인 데이터 국지화를 불러와 오히려 데이터 경제 부흥을 어렵게 한다. 우리는 국내 기업이 해외에 진출해서 더 많은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도록 데이터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 자체 인구와 자체 기업만으로도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중국, 데이터 거래가 합법화돼 있어 수 많은 데이터 브로커 기업들이 있는 미국,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인구가 7억명에 달하는 유럽 등과 우리는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야 할 때다.

2부 ‘데이터 주권’ 토론회에서 박영선(오른쪽 두 번째)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박영선=데이터 주권 규범 확립에서 우리가 많이 늦은 게 사실이다. 규범이 만들어져야 이를 근간으로 산업이 만들어진다. 블록체인이 개인정보법과 충돌해 우리 기업들이 헤맨 선례도 있다. 법이 기술 발전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는 간극을 최대한 좁혀야 한다. 데이터 경제 활성화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사회자=데이터 주권 논의가 이제 막 시작된 단계라 데이터 리터러시(해석력) 등 들여다봐야 할 문제들이 굉장히 많다.

김상배=외교안보적 시각도 필요하다.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개인 데이터가 빅데이터가 되고 안보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외교 차원에서의 적절한 대응도 필요하다. 앞으로 초국적 데이터 이동이 더욱 활성화할 것이고 국가간에 아주 세부적 협상이 필요한 시점이 올 것이다. 데이터 경제는 남들을 따라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지식 집약적 성격이 크다. 데이터 주권에 입각해 국제 규범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사회자=데이터 주권의 문제를 기업의 관점, 경제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외교나 안보적 시각의 도움도 필요해 보인다.

김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서재훈 기자

김현경=데이터 주권에는 거대 플랫폼 기업에 의해 디지털 경제 시장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과, 이를 견제하면서 경제 주권을 지키려는 전략적 의도도 포함돼 있다. 미국은 데이터 유통이 자유로우면서도 자국 안보나 이익과 관련해서는 아주 보수적으로 집행력을 행사한다. 미국 정부가 클라우드 기업의 해외 서버에 저장된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클라우드법을 제정한 게 단적인 예다. 우리나라는 유독 개인정보 등 데이터 유통을 개인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다. 미국, 유럽 등 다양한 국가의 실정을 우리에 맞게 벤치마킹 할 필요가 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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