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축물 평균수명은 왜 짧나

주영재 기자 2019. 8. 3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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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력벽 구조라 노후 배관·배선 등 교체에 어려움… 설비 수명 짧아 조기 재건축 선택

“살기는 괜찮아. 바깥이 허름해서 그렇지. 안은 수리를 하고 사니 불편한 건 없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꼭대기 사람들은 힘들지.”

지난 8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아파트에서 만난 주민 최보옥씨는 집의 벽을 두드리며 “짱짱하잖아. 기둥이 튼튼해”라고 말을 보탰다. 최씨는 이 집을 약 30년 전에 샀지만 실제 입주해 살게 된 것은 10년이 조금 넘었다고 했다. 이 아파트는 지하철 2·5호선이 지나는 충정로역에 인접해 교통이 좋아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들이 세를 들어 많이 살고 있다. 집주인으로 사는 사람들은 연세가 있는 분들이다.

충정아파트는 1932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다. 평균수명이 30~40년에 불과한 보통의 한국 아파트와 달리 장수를 누리고 있다. 굴곡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70년대 후반 도로 확장을 위해 두 차례 아파트의 앞동이 잘려나갔다. 외교사절이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내기 위해 잘라낸 것이다. 현재는 충정로로 불리지만 과거엔 ‘귀빈로’로 불렸던 이 길의 중앙선까지 원래 충정아파트의 공간이었다.

충정아파트는 5개층으로 가운데 중앙 공간(중정)이 있는 구조이다. 중정의 한쪽 벽엔 과거 중앙난방을 하기 위해 지하실에서 석탄을 땐 흔적인 굴뚝이 옥상 위까지 쭉 뻗어 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충정아파트의 모습. 1932년 준공된 충정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로 서울시는 문화시설로 보존할 계획이다. 주영재 기자

충정아파트의 ‘장수 비결’ 지은 지 80년이 넘은지라 페인트칠은 곳곳이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 있었다. 하지만 벽에 금이 간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부동산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건물을 돌아보니 지하에서 5대의 펌프가 물을 쉼없이 퍼내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설 때 살짝 느꼈던 곰팡이 냄새의 주범이었다. 건물을 무너뜨리지는 않아도, 고쳐야 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충정아파트 주민들은 사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집을 고쳐 써왔다. 최씨도 처음 들어올 때 집안에 있던 연탄 아궁이를 떼어내고 바닥을 새로 깔았다. 최씨가 살던 이전에는 중앙난방을 없애고 개별 연탄보일러를 때는 방식으로 고쳤을 것이다. 녹물이 나오지 않으니 필시 배관도 교체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지난해 말 충정아파트를 문화시설로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올해 5월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업설명회를 가졌다. 충정아파트를 리모델링해 문화시설로 보존하는 대신 기존에 살던 주민들은 바로 옆에 세워지는 두 동의 주상복합 건물로 이주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충정아파트 집주인들에게 조합원 자격을 주는 대신 용적률(대지면적 대비 바닥면적의 비율)을 높여줘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득하고 있다.

충정아파트가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최씨가 ‘짱짱하다’고 말한 기둥에 있었다. 건물은 크게 기둥 구조와 벽식 구조로 나뉜다. 기둥 없이 내력벽이 위층 수평구조(슬래브)의 무게를 지탱하는 구조가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벽식 구조’다. 공동주택이든 단독이든 지금의 거의 모든 주택은 벽식 구조를 택하고 있다. 기둥식은 수평 기둥인 보가 있으면 ‘라멘’ 구조, 보가 없이 슬래브와 기둥만으로 이뤄져 있으면 ‘무량판’ 구조로 분류된다. 기둥식은 사무용 건물이 주로 택하고 있다.

건물의 수명을 늘리기에는 기둥식이 훨씬 유리하다. 건물의 하중을 내력벽이 아닌 기둥으로 받치고 있어 노후한 배관과 배선을 그때그때 교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거의 모든 국내 공동주택은 설비가 구조체에 묻혀 있어서 재건축이 아니고선 교체가 불가능하다. 대규모 리모델링으로 교체할 수도 있지만 높은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재건축을 택하게 된다.

김수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충정아파트의 경우 기둥방식으로 지어 내부공간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설비도 바꿀 수 있다”며 “충정아파트는 연탄아궁이에서 보일러로 바꿔도 구조를 그대로 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길이 나면서 앞동이 잘려 나가는 변화를 겪었지만 구조체 자체의 안정성에 문제가 없었고, 기본 유지·관리만 잘하면 장기간 사용에 무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수암 연구위원은 “구조체의 내구성과 공간의 가변성, 설비의 수리 용이성 이 세 개가 조합이 잘되면 건축물의 수명은 얼마든 늘어날 수 있다”며 “기둥식으로 지을 때 비용이 더 든다는 거부감이 공동주택을 내력벽 방식으로 짓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리모델링을 거쳐 문화시설로 보존되는 충정아파트와 인근에 새로 지어질 주상복합 건물의 조감도. 서울시 제공

100년 이상 장수명 주택 가능할까 지금의 공동주택 건축물은 구조체보다 설비에 의해 수명이 좌우된다. 수명이 15~20년 정도인 배관과 배선 등을 교체할 필요성 때문에 구조체가 문제 없어도 철거가 되는 것이다. 영국 건축물의 평균수명이 130년, 미국이 75년, 프랑스가 80년인 데 비해 한국의 건축물이 ‘조로’ 혹은 ‘조기사망’하는 이유다.

강지연 SH공사 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배관을 콘크리트 안에 묻어 버리니 수리가 불가능하고 가족 구성원이 바뀌어도 집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장수명 주택’을 만들기 위해 설비와 배관을 콘크리트 안에 묻지 않고 바깥으로 노출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현재는 절충적인 방식으로 배관과 배선을 넣은 관을 또 다른 관에 넣는 이중관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이 방식을 쓰면 배관을 벽체에 넣어 리모델링 공사를 할 때 쉽게 제거할 수 있다.

강지연 연구원은 “공용배관은 바깥에 노출하고, 세대 안에서는 구조체에 묻지 않고 천장에 이중배관을 만든 후 모르타르 마감을 한다”며 “미관상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벽체도 사용자가 쉽게 옮길 수 있는 가변 벽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배관·배선 설비를 넣는 기술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한국 공동주택의 ‘조로’를 재촉하는 것은 개발이익이라고 강조했다. 대개의 재개발이나 재건축, 리모델링 등이 최저 입찰로 싼 가격에 지어서 개발이익을 노리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분위기에서 비용이 더 드는 기둥식으로 장수명 주택을 짓기란 쉽지 않다. 주거의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한국만의 특성도 작용한다. 김태섭 주택산업연구원 정책연구실장은 “30년 정도 되어서 건물이 노후화되고 주차문제도 심각해지는 데다 새로 짓는 주택들이 첨단 ‘스마트홈’으로 바뀌는 걸 보면 노후주택에 사는 주민 입장에서도 주택 가치가 올라갈 것이 거의 확실한 재건축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업기간이 긴 재건축 대신 리모델링이 대안으로 부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공동주택 리모델링의 경우 거의 구조체만 남기고 대부분을 다 새로 하는 수준이라 비용이 많이 든다. 많을 경우 신축비용의 최대 80%에 달할 정도이다. 서울 중구 약수동의 남산타운 아파트의 리모델링이 지지부진한 것도 사업성이 밝지 않기 때문이다. 남산타운의 한 부동산 관계자는 “30~40평형은 구조만 바뀌는 거지 (면적이) 더 느는 것도 아니고 26평만 복도식에서 계단식으로 바뀌고 화장실이 추가되면서 평수가 3.6평 정도 늘어나는 수준”이라며 “반면 분담금은 평형별로 7000만~1억3000만원에 달해 차라리 그 돈을 더해 같은 평수의 새 집으로 가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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