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교 나왔나요?" 이 질문이 왜 나쁘냐면

노도현 기자 2019. 9. 1. 09:0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채용, 승진·배치 등 고용 전 과정에서 출신학교 차별금지법 재추진

/ 일러스트 김상민

더 이상 기업들의 입사지원서는 ‘부모님 뭐하시느냐’고 묻지 않는다. 키와 체중, 혼인 여부, 본적을 적는 칸도 사라졌다. 지난 7월부터 시행된 개정 채용법 덕이다. 직원 수가 30인 이상인 기업들은 서류심사나 면접과정에서 직무수행과 관련 없는 개인 신상정보를 수집해서는 안 된다. 위반시 300만~500만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단 학력사항란은 여전히 살아있다. 취업준비 커뮤니티에는 이런 질문이 수두룩하다. ‘지방대인데 서류 합격하신 분들도 계신가요?’ ‘○○도 학벌 많이 보나요?’

출신학교란도 지운다면 어떨까.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지난 7월 ‘고용상 출신학교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출신학교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하면서 문재인 정부 초기 활발했던 출신학교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다시 동력을 얻었다.

법안의 핵심은 채용과정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출신학교로 지원자를 차별하지 않도록 출신학교·학력란을 삭제하자는 것이다. 채용뿐 아니라 승진·배치 등 고용 전 과정에서 출신학교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행위가 반복됐을 때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단, 연구직처럼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합리적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학력사항을 기재할 수 있게 열어놨다.

20대 국회 들어 민주당 오영훈 의원을 비롯해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 정의당 심상정 의원 등 여야 가릴 것 없이 유사한 법안을 내놨지만 진척이 없었다. 그 사이 ‘학교에 따른 차별은 없다’고 공언하고도 지원자의 출신학교별 등급을 매겨 점수를 부여하거나, 등급마다 다른 기준을 적용한 기업의 사례들이 드러났다. 소위 ‘명문대’ 지원자들을 합격시키려고 면접점수를 조작한 기업도 있었다.

왜 법까지 만드냐고요?

헌법 제11조는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고용정책 기본법 제7조 1항을 보자.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에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신앙, 연령, 신체조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학력, 출신학교, 혼인·임신 또는 병력 등을 이유로 차별을 하여서는 아니되며, 균등한 취업기회를 보장하여야 한다.’

출신학교 차별금지법은 고용정책 기본법이 선언적인 규정에 그친다는 데서 출발한다. 교육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의 홍민정 상임변호사는 “실질적인 규제력을 갖는 법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했다. “헌법에 합의된 가치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를 구현하자는 것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와 심각한 사교육 문제 등을 고려할 때 고용에서 합리적 이유 없는 출신학교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업의 활동을 과도하게 규제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017년 정부가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을 의무화하고 민간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자 “학업이 입사 전 이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원자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능력 지표”라며 “학력까지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업의 눈을 완전히 가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헌법학자인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평등권을 보다 철저히 보장하기 위한 출신학교 차별금지법이 과도하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오히려 출신학교에 따른 사기업의 채용 차별이 과도했던 것”이라며 “기본권은 전통적으로 국가가 주로 침해했고 국가에 대해 주장되는 권리였지만, 국가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사기업·사인에 대해서도 주장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학벌보다는 부모의 재산으로 계급이 나뉜다는 ‘수저론’이 통하는 세상. 하지만 학벌과 자본이 결합했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들다. 김은종 사걱세 선임연구원은 출신학교·학력을 능력이 아닌 후천적 배경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노력한 개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대학입시에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고,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학벌이 곧 능력이고 취업 이후까지의 삶까지 지배하는 프레임을 깨자는 거죠.”

‘학벌≠능력’ 공감대는 있지만

건설 소프트웨어 개발사 ‘마이다스 아이티’는 2011년부터 전 직군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하고 있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신입사원 284명. 한 언론의 대학 평가를 기준으로 출신대학이 상위 10위 안에 드는 1그룹은 25%, 11~40위권인 2그룹 36%, 41위 이하인 3그룹은 39%였다. 고성과자로 평가받은 사원들을 따져보니 1그룹은 20%, 2그룹은 36%, 3그룹은 44%였다. 학벌 좋은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통념을 깨뜨린 결과다.

2017년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506개 기업 인사담당자는 인재를 선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직무적성(75.1%)과 인성(56.3%), 직무경험(48.2%)을 꼽았다. 학력사항은 1.2%에 그쳤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의 임민욱 팀장은 “기업들은 학력사항이 업무역량과는 관계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출신학교를 성실성의 기준으로 참고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불필요한 요소는 빼는 게 맞다고 보는 추세지만 기존 채용 시스템을 확 바꾸기도 어려워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는 대부분 공감한다.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이 다양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법제화까지는 무리라는 우려가 상당하다. 강순희 경기대 직업학과 교수는 “대다수가 대학졸업장을 가지면서 학력이 능력을 나타낸다는 믿음이 무너지고 학벌주의를 야기한 상황에서 블라인드 채용은 필요하다”면서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다. 강 교수는 “‘뭘 보고 뽑느냐’는 지적은 그간 기업들이 채용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라며 “정부가 적절한 지원책으로 민간기업들의 블라인드 채용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 학벌타파 운동을 주도했던 김동훈 국민대 법대 교수는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좋은 대학을 나온 것이 주는 이점이 약해지고 큰 틀에서 학벌주의가 변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상황에서 법제화는 무리가 있다”며 “시험을 치는 데만 쓸모 있는 ‘시험적합성’이 능력과 동일시되면서 생기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