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신범철] 반미 망령에 대한 기우

2019. 9. 2.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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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근무 중인 고위직 외교관의 메일을 받았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를 정부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미국에 대해 협상 카드로 활용할 것으로 짐작한다면서, 미국이 이 문제를 풀려면 한국보다 일본을 더 압박해야 한다고 전해왔다. 외교를 잘 아는 분의 전언이고 정부 입장을 지지하는 많은 국민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다. 실제 그랬으면 한다. 하지만 문제를 들여다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행보가 있다.

협정 종료 과정을 보자. 당초 정부의 입장은 ‘협정은 유지하되, 일본이 백색국가 지정 제외를 취소할 때까지 정보교류를 안 한다’는 조건부 연장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당일에 결정이 바뀌었다. 한·미 간 의사소통의 결과라기보다는 정부의 일방적 선택임을 의미한다. 여론조사 결과를 참고했다는 설명은 국내정치적 고려가 영향을 미쳤다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미국에 대한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 했어도 조건부 연장이 바람직했다. 정보 교류를 희망하는 미국이 일본에 태도 변화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협정 종료 결정에 모든 비난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이 이해한다고 설명했고 한·미 관계에 악영향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미국의 반응은 깊은 실망과 우려를 넘어서고 있다. 협정 종료를 통해 미국을 움직여 일본을 압박하고자 했어도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미국이 한국만을 압박하는 것은 유감이다. 상황 악화에 일본의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의 협정 종료 결정에 실망하고, 한국은 일본의 백색국가 제외를 비난하며, 일본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금년 5월까지 우리 정부가 외교적 교섭을 거부한 것에 토라져 있다. 아무튼 문제를 해결하려면 꼬인 순서 반대로 풀어야 한다. 즉, 강제징용 해법과 백색국가 문제를 맞바꾸면 협정 종료를 철회할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미국은 상황이 악화하기 전에 한·일 양국에 모두 관여했어야 했다. 역사 문제 개입을 꺼려온 미국의 관행은 이해하지만 예방외교가 아쉽다.

국가 간 이익이 다를 경우 동맹이든 우방이든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한·미 관계나 한·일 관계가 항상 좋았던 것도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상황을 안정시키고 실마리를 찾아 풀어나가며 관리해온 관계였다.

하지만 지난주 정부의 대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사실상 초치한 것까지는 주권국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논의 내용을 밖으로 공개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주한미군 기지 반환 문제를 갑자기 꺼낸 것도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갈등을 확대시키는 조치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려와 실망 표현도 과하지만,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방부 장관이 연이어 서울을 찾아 연장을 요청한 사안을 우리가 대놓고 거절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지 맞대응으로 상황을 악화시킬 일은 아니다.

정부의 외교가 미숙해서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정말 걱정되는 것은 ‘이참에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하는 자주적 정부로서 인기를 얻어 보겠다’는 포퓰리즘이다. ‘자주 대 동맹’의 대결로 재미 좀 보겠다는 건 아닌지, 반대 의견을 친미와 친일로 규정하고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이런 행동은 감정적 대응을 촉발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때 지난 반미의 망령을 불러오고 주변 환경이 불안정한 시기에 한·미동맹을 망가뜨린다.

오늘날 자주만 외치며 살아가는 나라는 없다. 미국에도 당당해야 하지만 한·미동맹이 훼손되면 북한에 당할 수도 있다. 오히려 북한 문제만 해결하면 자주의 기회는 자연히 찾아온다. 당면한 위협에는 침묵하고 위기 시 도와줄 친구와 틀어지면 국가안보가 흔들린다. 준비 없이 자주 한다고 나서다간 외톨이가 될 뿐이다. 정부 결정에 애정을 갖고 상황을 좋게 보려는 분들이 옳았으면 한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걱정은 그저 기우이길 바란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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