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 5000만원 잃었어요" 불법 온라인 도박의 늪, '좀비'가 된 청년들

김상범 기자 2019. 9. 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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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다리 게임(왼쪽)과 사설 스포츠토토 화면

“실제로 돈을 따지 못해도요, 돈을 거는 순간만큼은 더 없이 행복해요. 매 순간 상상의 나래를 펼치죠. ‘이 돈만 따면 옷도 사고 친구들이랑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갈 거야.’ 그러다가 경기 결과가 나오는 순간 엄청난 좌절감이 밀려와요. 그런데 이 좌절감은 금방 사라져요. 경기는 너무나도 많고 베팅할 기회도 널려 있으니까요.”

‘환각’. 직장인 윤재환씨(가명·27)는 불법 스포츠 도박, 일명 ‘사설 토토’에 빠져 있던 지난 8년을 돌이킬 때마다 이 단어를 떠올린다. 일거에 수백만원을 날려도, 그래서 빚더미에 오르고 친구들이 곁을 떠나도 멈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현실이 불행해질수록 가장 손쉽게 쾌락을 선사해주는 대상을 찾았다. 윤씨는 도박 중독자였다.

불법 온라인 도박에 몸과 마음을 잠식당한 청년들이 늘고 있다. 도박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정보통신(IT) 기술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도박은 더 쉽고, 훨씬 중독적인 형태로 변모해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청년들과 심지어 10대 청소년들의 일상까지 파고들고 있다. 경향신문은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 불법도박의 수렁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청년들에게 도박 중독의 경험담을 들었다. 이 영상은 경향신문 유튜브 채널 <이런 경향>에서도 볼 수 있다. (https://youtu.be/O0oLfpdDGqM)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교실 컴퓨터로 도박 사이트에 접속하는 모습을 본 것이 발단이었다. 국내외 스포츠 경기에 돈을 거는 사설토토 사이트였다. “너도 한번 해 볼래?” 이 말에 윤씨도 무심코 사이트에 가입했다. 그 무렵 불행했던 가정사까지 겹치면서 그는 “유일하게 재미와 낙을 주는 대상”이었던 사설토토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지난해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사감위)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내 도박중독자 수는 약 222만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20대는 ‘문제군’의 비율이 2년 전에 비해 2배 상승한 2.5% 수준으로 나타났다. 불법도박을 뜻하는 ‘사설 사행활동’의 경우, 20대의 경험률은 2016년 0.2%였던 것이 지난해 7.9%로 급상승했다. 20·30대 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도 쉽게 빠지곤 한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에 따르면 도박중독 치료를 받은 내담자 가운데 청소년은 2015년 168명에서 지난해 1027명으로 6배가량 늘었다. 전 연령대 중 가장 가파른 증가세였다.

윤씨의 경험은 IT기술의 발전으로 도박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현실과 무관치 않다. 윤씨가 빠져든 사설토토와 함께 불법 온라인 도박의 양대 축을 이루는 ‘사다리 게임’은 도박에 접근하기 쉬워진 이런 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종이에 가로·세로 선을 그어 결과를 맞추는 가벼운 내기를 PC와 모바일에서 구현한 게임이다. 사용자들은 ‘홀’과 ‘짝’ 두 선택지에 베팅하고 결과에 따라 돈을 잃거나 딴다.

윤씨 역시 군대 제대 후 스마트폰으로 사설 스포츠토토와 사다리 게임을 동시에 즐겼다. 호주, 스위스, 이탈리아…. 돈을 걸 만한 해외 축구리그는 많았다. 축구 시즌이 끝나면 MLB 같은 농구 시즌이, 그 뒤에는 메이저리그 등 야구 시즌이 이어졌다. 윤씨는 “1년 내내 사이클이 돌면서 계속 돈을 걸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스포츠 경기에 돈을 거는 틈틈이 사다리 게임도 했다. 사다리 게임은 규칙이 단순한 것에 비해 최대 수백만원까지 걸 수 있어 돈이 도는 회전율이 빨랐다. 윤씨는 “5분마다 결과가 나오니까 짧은 시간에 큰 돈을 벌거나 잃거나 했다”라고 말했다.

8년 만에 5000만원에 달하는 돈이 ‘토사장(불법 사설토토 운영자)’에게 빨려들어갔다. 제도권 바깥 금융권에서는 윤씨처럼 직장도 소득도 없는 청년들에게 쉽게 돈을 내줬다. “친구가 ‘도박으로 큰 돈 벌어보자’라면서 대출을 받을 건데 보증을 서 줄 수 없겠냐고 하더라고요. 대부업체에 간략한 서류만 내니까 그날 600만원이 나왔어요.” 쉽게 나온 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번 빚에 옭아매진 뒤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원금을 복구하기 위해 또 대출을 받아 베팅을 했다. 베팅하고, 돈을 잃고, 대출을 받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졌다.

목돈을 잃은 젊은 도박 중독자들은 아예 ‘그 세계’에 직접 발을 들이기도 한다. 박세훈씨(가명·25)가 그랬다. SNS에서 불법 사다리 게임 광고를 접한 뒤 빠르게 빠져든 그는 머지않아 총판(불법도박사이트 회원 모집책)이 됐다. ‘픽을 해준다(게임 결과를 알려준다)’는 미끼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도박 사이트에 가입시킨 뒤 수수료를 챙겼다.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 살 돈을 벌기 위해 중간 상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불법 사이트 운영자는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태국·필리핀 등 동남아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한다. 박씨는 “그래서 운영자들은 국내 회원을 모집할 일종의 ‘영업팀’이 필요하고 어린 중독자들이 쉽게 이 길로 접어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가 도박에 빠져 있던 기간은 1년이 채 안 된다. 하지만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금전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 도박에 갉아먹혔다. 집에 틀어박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보니 순식간에 40㎏이 불었다. 그는 “중독자의 사고방식은 정상인들과 다르다”라고 말했다. “자기가 도박에 빠졌다는 걸 자각을 못 해요. 불법도박 회원들 커뮤니티에 가 보면 몇억원씩 잃은 사람이 즐비해요.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그저 취미로 즐기는 거지’라면서 자기합리화를 해요. ‘중독된 게 아니라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모든 도박 중독자들이 갖고 있어요.” 하루에도 수백만원을 잃고 따다 보니 노동으로 버는 소득은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는 “아르바이트는 그냥 도박자금을 대기 위한 충전소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도박의 늪에 빠져든 이들이 ‘현실’을 깨닫는 시점은 언제일까.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박씨의 경우는 좀 빠른 편이었다. “모든 걸 다 탕진하고 돈 당겨올 곳도 없고, 신용불량자가 돼서 독촉장이 날아왔을 때 눈이 번쩍 떠졌어요. 어느 날 거울 속 제 자신을 봤는데….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비참한 사람이 없더라고요.”

두 청년은 도박을 끊을 마음을 먹은 계기로 주변인들의 ‘관심’을 이야기했다. 윤씨는 누나와 매형의 도움으로 도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중독자에 대한 비난과 편견보다는 관심과 애정을 갖고 중독 경험뿐만 아니라 현재의 불만과 인생 상담을 폭넓게 들어주는 주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도박 중독은 ‘질병’이기 때문에 절대 혼자서는 끊을 수 없다”라며 “감기 걸리면 병원에 가듯, 주위 상담센터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찾아가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이바미 인턴PD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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