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30대 동서에 치여.. 40대 며느리 억장 무너진다

박돈규 기자 2019. 9. 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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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추석이란 무엇인가 5000명이 답했다
일러스트= 안병현

지난 31일 오후 4시 고속도로에서 잠이 깼다. 경부고속도로 천안 부근. 버스는 전용차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경부선 서울 방향 77㎞ 구간에서 시속 40㎞ 미만으로 서행'이라는 뉴스가 보였다. 올 것이 왔구나. 벌초 행렬을 시작으로 추석이 다가온 셈이다.

민족 최대 명절이라는 위엄은 해마다 훼손되고 있다. '추석을 없애자'는 국민 청원이 올라왔고 차례 문화를 거부하는 가구도 늘어난다. 종교적 이유는 옆으로 밀쳐두자. 추석은 까딱하면 세대 갈등과 남녀 갈등이 연쇄 폭발할 수 있는 최전선이다. 아내는 느닷없이 19세기 며느리처럼 전을 부치고 남편은 부엌을 흘금거리며 눈치를 본다. 취업하지 못했거나 결혼을 미룬 20~30대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어른들이 무심한 질문을 던지곤 하니까.

지난해 가을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김영민 서울대 교수)이 화제를 모았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 물으면,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 대꾸하라는 식이다. 위트가 돋보였지만 현실에서 써먹을 순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추석을 나고 있을까. '아무튼, 주말'이 SM C&C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설문조사를 의뢰했다. 연령대별로 1000여 명씩 20~60대 남녀 5052명이 응답했다.

노동인가 휴식인가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우리 집이 더 엄격하거나 더 느슨한 건 아닐까. '예전부터 지낸다'가 53%였다. '최근 몇 년 사이 안 지내기로 했다'가 26%, '오래전부터 안 지낸다'가 21%로 나왔다. 이 응답대로라면 네 집 중 한 집, 국민 1000만여 명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전통을 버린 것이다. 특히 30대 남성은 33%나 이렇게 답했다.

회사원 이모(45)씨 가족은 지난 5일부터 추석 연휴까지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추석엔 차례 안 지낸 지 5년째다. 그는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설에만 일가친척이 모이고 추석은 각자 편하게 보낸다"며 "세월이 더 흐르면 설에 차례를 지내는 일도 없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추석이 노동인지 휴식인지도 물었다. '둘 다'라는 응답이 37%. 연휴가 길어 일하고도 쉴 수 있다는 뜻이다. '노동이다'는 32%, '휴식이다'는 22%였다. 남녀 차이, 세대 차이가 뚜렷했다. 40대 여성은 51%가, 50대 여성은 47%가 '노동'이라 답했다. '휴식'이라는 의견은 20대 남성(35%)과 60대 남성(30%)에서 상대적으로 많았다.

10년 전과 견주면 무게중심은 어느 쪽으로 이동하고 있을까. '휴식이 강해졌다'가 38%, '노동이 강해졌다'가 33%였다. '휴식이 강해졌다'는 50대 남성(52%)이, '노동이 강해졌다'는 40대 여성(44%)이 각각 최고치를 찍었다. "명절 노동에 가장 큰 짐을 짊어진 그룹은 40대 여성이다. 어머니 세대는 일선에서 물러났고 30대 이하 여성은 웹툰 '며느라기'처럼 시댁에서 희생하는 데 거부감이 크다"고 틸리언은 분석했다.

추석은 1989년부터 사흘 연속 공휴일이다. 2014년 대체휴일제까지 도입돼 '가을 휴가'와 같다. 차례를 안 지낸다면 뭘 할까. '그냥 쉰다'가 54%로 1위였다. '여행'(27%) '종교 시설에 간다'(10%) '일한다'(9%)가 뒤를 이었다. '여행'은 30대에서 32%를 차지했다. '일한다'는 40대 여성(12%)과 20대 남성(12%)이 다소 높았다. 벌초와 성묘에 대해서는 '둘 다 한다'가 25%, '성묘만 한다' 19%, '벌초만 한다' 14%로 조사됐다.

추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조상(고향)'과 '음식 장만'이었다. 각각 27%. '교통체증(운전)'이 18%, '시댁(처가)' 15%, '스트레스(진학·취업·결혼 등)' 13% 순이었다. 60대 남성은 53%가 '조상(고향)'을 꼽았다. '교통체증'은 40대 남성(23%)에서, '음식 장만'은 50대 여성(46%)에서, '스트레스'는 20대 여성(24%)에서 높게 나왔다. 추석은 누구에게는 그리움, 누구에겐 고통이다.

괴로운 이유, 성·세대마다 달라

민족 대이동은 명절 증후군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김순종 박사가 2014년 발표한 논문 '명절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추석이나 설에 남녀 차별과 자아 상실감을 겪는 사람이 많다. 가족끼리 신경전을 벌이거나 얼굴을 붉히고, 심할 경우 이혼으로 이어진다. 표면 아래 있던 반목과 갈등이 명절을 계기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난해 추석 다음 달인 10월에 협의 이혼 신청은 총 1만2124건. 전월(9056건)보다 33.9% 늘었다. 같은 기간 법원에 접수된 이혼 소송은 3374건으로 전월(2519건)에 비해 27.6% 증가했다. 혈족을 한자리로 모으는 명절이 현대사회에선 가족 해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추석에 가장 큰 스트레스는 뭘까. '경제적 부담'(31%)이 으뜸이었다. 50대(42%)와 60대(37%)가 많이 토로했는데 특히 50대 여성의 46%가 스트레스 1순위로 돈을 지목했다. '이동에 따른 부담'(18%)은 연령대와 관계없이 고르게 나타났다. '명절에만 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20대 여성에서 19%로 가장 높았고 30대 여성(15%), 20대 남성(13%) 순이었다. 20대 여성의 23%, 20대 남성의 19%, 30대 여성의 17%는 '곤란한 질문을 받는 것'이 괴롭다고 했으니 어른들은 주의하시길. 특히 진학·취업·결혼 이야기는 따로 만나 밥이라도 사주면서 하시라. 관심도 지나치면 간섭이다.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20대 남성(17%)이, '부모나 형제간 갈등'은 60대 남성(15%)이 스트레스 원인으로 꼽았다.

근무나 다른 방법으로 명절을 기피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 현상에 대한 견해를 묻자 '부럽다(충분히 이해한다)'가 39%, '이해는 하지만 그럴 것까지야'가 54%,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가 7%로 나타났다. '부럽다'는 20대에서 51%, 30대에서 45%로 높았다. 뜯어보면 20대 여성의 62%, 30대 여성의 54%, 40대 여성의 52%가 이렇게 고백했다. 반면 50대 여성은 35%로 평균 이하. 40대 여성과 50대 여성의 관점 차이가 두드러졌다.

명절은 1년에 두 번, 여러 세대가 한곳에 모이는 특수 상황이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인류학자인 박한선 서울대 강사는 "할아버지 세대와 중장년, 젊은 세대는 제각각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했다"며 "명절을 둘러싼 갈등은 한국 사회가 빨리 변화하면서 생긴 불일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지고 있던 가치와 관점을 누군가는 포기해야 해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30년 뒤 추석 모습은?

대가족이 사라지고 남녀 평등 의식이 커지면서 추석은 천덕꾸러기가 된다. 명절의 참뜻을 새겨볼 필요는 있다. 김병일 전 국학진흥원장은 저서 '선비처럼'에 썼다. "추석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과의 만남이자 그리움, 또 자손이 한자리에 모여 형제애를 확인하는 자리다. 차례 문화는 효(孝)의 살아 있는 교육장이기도 하다."

명절과 제사는 현실과 다양한 형태로 타협 중이다. 어느 집안에서는 1년에 10회 가까운 제사를 올해부터 석가탄신일에 합쳐 지낸다. 설에는 시댁만, 추석엔 친정만 간다는 부부도 있다. 큰집에만 부담 주지 말자며 형제가 번갈아 차례를 모시기도 한다. 대학교수 최모(여·64)씨는 "남동생이 지방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는데 명절은 대목이라 모일 수가 없다"며 "올해는 마켓컬리에서 추석 음식을 배송받아 단출하게 보낼 것"이라고 했다.

다음 세대에 추석은 지속 가능할까. 설문 응답자 중 36%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거나 없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규모는 축소되지만 형식은 비슷할 것이다'가 53%, '그대로일 것이다'가 11%였다. '완전히 다른 모습이거나 없어질 수도 있다'는 50대에서 38%로 가장 높았고 60대 37%, 40대 35% 순이었다. 세부적으론 50대 여성의 43%, 30대 여성의 42%, 40대 여성의 41%가 그렇게 답했다. 주부 정모(42)씨는 "내 또래 여성들은 추석 노동을 여간해서는 피할 수 없다"면서 "우리 세대에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명절 준비를 여성이 전담하던 시대는 지났다. 추석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현대인으로 돌아간다. 박한선 강사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수십 년 지켜온 전통이 무너지는 것을 굳이 추석 차례상 앞에서 목격할 필요도 없다"며 "서로 배려하면서 과거 대가족 시대와 성 역할을 체험하는 날로 받아들이면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존중받지 못하면 누구나 명절 증후군… 시어머니와 중년 남성까지 확산

최대한 편하게 이동해 피로 줄이고 배려할 자신 없으면 말을 줄여야

명절 증후군은 과거에 ‘며느리 병’이라 불렸다. 최근에는 가족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 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 교수는 “시어머니와 중년 남성도 명절 증후군을 호소한다”며 “추석 직후는 물론이고 추석이 다가오는 게 두려워 병원을 찾는 분들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채 교수와 함께 명절 증후군의 원인과 예방법을 Q&A(질문과 답)로 정리했다.

Q1. 어떤 증상인가?

“하기 싫은 일을 앞두고 있으니 걱정하고 불편해한다. 갔다 오면 화가 나고 우울하다고 한다. 일종의 화병이다. 원래 증상이 있는 분들은 더 심해진다. 신체적으로는 두통과 어지럼증, 소화불량 등이 나타난다.”

Q2. 시어머니도 명절 증후군을 겪나?

“옛날처럼 핍박받는 며느리에게 국한된 병이 아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에겐 다 생긴다. 시어머니와 중년 남성, 청년으로도 퍼지고 있다.”

Q3. 원인이라면.

“가족 사이에 잠재돼 온 ‘관계의 문제’가 명절에 불거지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투면 아들(남편)도 난처해진다. 남자들은 일가친척 모인 자리에서 이러쿵저러쿵 비교당해 감정이 상한다. 명절에 이동하고 일하느라 몸이 지치면 마음도 취약해진다. 결국은 사람이 독(毒)이 돼 생기는 병이다.”

Q4. 명절에 사람을 안 만날 순 없는데.

“실제로는 접촉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점점 덜 만나고 있다. 배우자가 알아차리고 보살펴줄 정도의 집이라면 대개는 명절 증후군이 없다. 무례한 언행을 하고 갑질하고 사생활을 침해하는 건 배려와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명절엔 특히 청년을 조심하자. 사회에 대한 분노가 쌓여 터지기 직전이면 잘못 건드렸다 어른이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

Q5. 명절 증후군을 피하거나 줄일 방법은?

“먼저 최대한 편하게 이동해야 한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망가지기 시작한다. 사위가 처가에서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평균적으로는 며느리가 시댁에서 더 크게 당한다. 상대를 배려하면서 대화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명절엔 말을 안 하는 게 낫다. 차라리 함께 윷놀이나 제기차기를 해라. 명절 직후엔 마사지든 쇼핑이든 보상이 필요하다. 몸에 쌓인 ‘사람 독’을 풀어야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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