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멀고 이상한 길을 돌아 도착한 선 없는 자유세계

입력 2019.09.0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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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런 홀로
나의 즐거운 사운드 생활

LP로 즐기던 음악생활
판 뒤집는 번거로움에 포기

블루투스 일상 들어선 뒤
구형 스피커와 온라인 스트리밍
평화로운 공존 가능해져
몇 년 전 엘피(LP) 플레이어를 선물받은 나는 중고 레코드를 ‘디깅’하는 데 열을 올리며 즐거운 사운드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소파나 침대에 누워 있다가 판을 뒤집거나 갈기 위해 30분마다 일어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판 뒤집어주는 리모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옛날 디제이(DJ)가 왜 존재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러던 내게 어느 날 ‘블루투스’가 찾아왔다. 게티이미지뱅크

몇년 전 엘피(LP) 플레이어를 선물 받았다. 내게는 엘피판이 몇 장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서울 종로구 동묘 시장, 중구 황학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중고 레코드를 ‘디깅’(엘피판을 고르고 수집하는 것)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레코드판은 돈을 조금 들인 신품 몇 장을 빼면 주로 오래된 클래식, 재즈 판들이 대부분이었다. 사고 싶은 판은 언제나 터무니없이 비쌌고,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엔 알 만한 브랜드의 클래식이 제일 위험 부담이 적었다.

문제는 엘피는 에이(A)면, 비(B)면으로 나뉘어 있고 한 면이 다 돌아가면 판을 뒤집어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양면을 다 듣고 난 뒤에 이 음반이 지겨워지면 또 판을 갈아줘야 했다. 소파나 침대에 누워 있다가 판을 뒤집거나 갈기 위해 30분마다 일어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판 뒤집어주는 리모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에게 ‘가서 판 좀 뒤집어줄래?’라고 해봤자 고양이는 ‘뭔 개소리’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옛날 디제이(DJ)가 왜 존재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음악 듣는 사람들을 대신해 판을 뒤집기 위해서다.(DJ님들 죄송합니다.)

더구나 내가 가진 엘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은 한계가 있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곡을 듣고 싶은 아침이 있었고, 50년대 재즈를 듣고 싶은 저녁도 있었지만, 조금 듣다 보면 언제나 다른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그러면 어김없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스포티파이(스트리밍 서비스)를 켜게 되었다.

그 경우에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폰 내장 스피커로 음악을 듣기가 싫었다. 따라서 좋은 음질로 음악을 들으려면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엘피 플레이어에 연결된 스피커의 연결선을 휴대전화에 꽂을 수 있는 것으로 바꿔 끼워야 했다. 고즈넉하게 맥주를 마시는 저녁 시간, 엘피를 듣다가, 판을 뒤집고, 판을 바꾸고, 유튜브를 켜고, 스피커 연결선을 바꾸고, 선은 꼬이고, 음식과 술이 차려진 테이블까지 선이 닿지 않고, 다시 엘피가 듣고 싶어지고, 스피커 연결선을 또다시 바꾸고…하다 보면 다 집어던지고 그냥 침묵 속에서 울고 싶어졌다. 그때 내게 손을 내민 것이 블루투스라는 빛이었다.

이중적 전자기기 사용자

지금 엘피 플레이어는 먼지 쌓인 채 거실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다. 엘피 플레이어 양쪽에 놓인 스피커의 뒷면에는 동그란 블루투스 리시버가 꽂혀 있다. 이제 엘피는 아침에 청소할 때, 주말에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할 때, 저녁에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잠시 기분을 가라앉힐 때 가끔 30분 정도씩만 듣는다. 그리고 음악을 지속적으로 듣고 싶을 때는 집 안 어디서든 유튜브나 스포티파이를 켠다. 스피커 연결선은 더 이상 바꿀 필요 없다. 내게는 동그랗고 귀여운 블루투스 동글(리시버)이 있으니까. 블루투스 기능이 없던 스피커는 이제 동글을 통해 블루투스 신호를 수신한다. 동글은 ‘뚜-루-루’ 경쾌한 소리와 어여쁜 파란 빛을 깜빡이며 준비가 됐음을 알리고, 곧 동글을 장착한 스피커는 나의 스마트폰과 페어링되어 가격 대비 놀라운 성능으로 유튜브 음원을 증폭해준다. 엘피 플레이어와 구형 스피커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의 평화로운 공존은 ‘블루투스 동글’로 손쉽게 가능해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좀 이중적인 전자기기 사용자다. 내가 갖고 있는 전자기기 중에는 구형이 많다. 딱히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사용한 것을 굳이 버리고 싶지 않아 하는 쪽에 가깝다고 할까. 그중 아마 제일 오래된 것은 15인치짜리 구형 브라운관 티브이(TV)일 것이다. 지금보다 더 좁은 집에 살 때 중고로 구입한 것을 여전히 쓰고 있다. 집에 놀러 오는 사람마다 ‘저게 보이냐’, ‘좀 바꾸라’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나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다. 우선 보는 데 불편함이 없고 좁은 공간에 자리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티브이를 최대한 안 보고 싶어 하나 실상은 주구장창 티브이만 보는, 안 그래도 중증인 타브이 시청자다. 그런 내게 더 좋은 티브이 시청 환경을 제공하고 싶지가 않다(는 이상한 변명을 늘 내 안에 가지고 있다).

그밖에도 내가 갖고 있는 휴대전화와 노트북은 둘 다 2014년 출시된 모델이다. 고장이 나지도 않았고 별 불편함이 없어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구형 모델이기 때문에, 액정에 엉망으로 금이 가 있기 때문에, ‘좀 바꾸라’는 말을 들으면 또 나름대로 이상한 변명들을 내면에서 중얼거린다. 전자기기에 대해서라면, 내가 원하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이들이 ‘태클’만 걸지 않으면 그걸로 만족이다. 뭐 그런 식으로.

먼 길로 돌아 도착한 블루투스 라이프

블루투스에 대해 말하자면, 할 수 있는 한 가장 이상하고 먼 길로 돌아 블루투스의 세계에 도착한 기분이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예전에도 증정품으로 받아온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가 집에 있기는 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을 굳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엘피 플레이어의 먼지 낀 다리를 건너 도착한 이 세계는 믿을 수 없이 편리하고 자유롭다. 적어도 집 안에서의 사운드 생활과 관련해선 이제 유선의 세계는 떠올리기조차 힘들다. 와이파이(무선인터넷)가 공기처럼 당연해진 지금, 컴퓨터에 랜선을 꽂아야만 했던 유선 인터넷의 시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컴퓨터 책상에 삐죽삐죽 나와 있던 두껍고 못생긴 랜선을 딸깍하고 랩톱에 꽂아 넣던 시절을? 아니다. 전혀 그럴 수 없다. 돌아가는 다리는 불탔고 유선 스피커의 세계는 내 삶에서 끝났다.

블루투스의 사랑스러운 위력을 일단 실감한 나는, 내친김에 집 안의 사운드 생활을 모두 무선으로 바꿔버렸다. 방에 스크린과 프로젝터를 설치하면서 블루투스 기능이 있는 스피커를 구입했다. 주로 집 안에서 사용하는 블루투스 헤드폰도 손안에 있다. 이제 음악을 들을 때 말고도 브이오디(VOD) 영화를 볼 때,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를 볼 때,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티브이를 볼 때도 선 없는 생활을 만끽할 수 있다.

블루투스가 상용화된 지가 언젠데 이제 와 블루투스를 갖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우스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이제 내게는 블루투스 이어폰의 세계로 넘어가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되면 집 안뿐 아니라 집 바깥에서도 ‘선 없는’ 사운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일단 넘어가면 돌아오는 다리는 불타버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자기기 생활을 돌아보면 언제나 그래 왔다. 더 최신의, 새로운 기술의, 고음질의, 고화질의, 더 편리한 단계로 한번 넘어가면 뒤로는 돌아가기 힘들다. 저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저질로 여겨지고,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지금과 다른 무언가에 최대한 눈과 귀를 길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이 내게는 있는데, 일단 이 세계를 알아버린 나는 아마 곧 블루투스 이어폰의 세계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다이나믹 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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