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며느라기' 대안 찾는 여성들 "겸상 못하고 음식 나르고..며느라기의 성역할 대물림"

탁지영 기자 2019. 9. 10.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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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서대문구 마을언덕홍은둥지에 주민들이 모여 명절 속 ‘며느라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풀뿌리여성주의단체 ‘너머서’ 제공

부엌 쪽 앉아 음식 차리는 등

어렸을 때부터 본 여성 모습

커서도 자연스럽게 잇게 돼

“아직도 기억이 나요.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명절 보내러 큰집에 갔거든요. 한 30~40명이 모였어요. 문을 열고 딱 들어갔는데 남자는 소파로, 여자는 부엌으로 가더라고요. 그때 제가 어린 나이였는데도 자연스럽게 여자 어른들을 따라서 부엌으로 갔어요. 지금도 시댁이나 친정을 가면 이 장면이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더라고요.”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마을언덕홍은둥지 공동체공간에 주민 17명이 모여 명절 풍경 속 ‘며느라기’를 이야기했다. 서대문구 풀뿌리여성주의단체 ‘너머서’가 가부장제를 비판한 웹툰 <며느라기>에서 영감을 얻어 기획했다. 2005년 만들어진 너머서는 2010년쯤부터 서대문구를 중심으로 주민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여성주의 활동을 해왔다. 이날 ‘비며느라기’인 사위와 비혼자, 결혼 3개월차 ‘갓 며느라기’, 며느리 두 명이 있는 ‘60대 며느라기’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경험을 나눴다.

17명이 4개 조로 나뉘어 자신의 며느라기 단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며느라기에는 4단계가 있다. 불평, 불만이 쌓이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요구되는 며느리 역할에 충실하는 1단계, 불합리한 관행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만 며느리 역할은 하는 2단계, 며느리이기 전 ‘나’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3단계, 기존 관행을 초월하고 완벽하게 자기주도적인 4단계다.

본인을 며느라기 2단계로 진단한 변경미 너머서 공동대표는 “할 이야기는 하긴 하는데 시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거역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60대 며느라기’ 김기선씨는 “우리 세대는 다 참고 살았다. 진짜 못 참겠으면 한마디씩 했다”면서 “우리 며느리들은 3기에 있다”며 웃음을 보였다.

밥 차리러 들어오라는 등

친정서 먼저 며느라기 겪고

끼니노동도 여성들 몫으로

참가자들은 며느라기의 성역할이 대물림된다고 했다. 나뭇잎(별명)은 “여전히 시댁에 가면 저랑 시어머니, 언니는 부엌 쪽에 앉는다. 부엌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반찬이 부족하다 하면 더 가져다준다”며 “부엌과 가깝다는 건 핑계다. 여성이 음식을 차리고 나르는 걸 어렸을 때부터 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결혼 3개월차 ‘갓 며느라기’ 라온(별명)도 “우리도 남성들은 거실에서 먹고 여성들은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부엌에서 먹는다”며 “겸상 안 하는 것도, 며느리가 음식 나르는 것도 어렸을 때 봤던 장면이랑 비슷하다”고 했다.

며느라기는 여성이면 대물림되는 성역할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연경씨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집에 없다’며 밖에 있는 내게 전화해 ‘밥을 차리러 들어오라’고 한 적도 있다”며 “시댁보다 친정에서 먼저 며느라기를 겪었다”고 했다. 강순영씨와 나뭇잎도 “결혼하면 여성은 자연스럽게 식구들을 먹이는 ‘끼니노동’을 한다. 끼니노동도 여성 안에서만 분담된다”고 말했다.

이번 추석 때는 ‘며느라기’

가족들과 함께 읽으면서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 것

참가자들은 ‘제사 음식 대신 가족 여행 제안하기’ 같은 대안을 떠올리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비혼자 혜인씨는 “이번 추석 때는 가족들과 <며느라기>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했다.

탁지영 기자 g0g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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