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문 대통령과 우리가 진정 우려할 나쁜 선례

고정애 2019. 9. 1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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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정치팀장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명백한 위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며 한 말이다. 화자(話者)의 주관이 크게 담긴 ‘나쁜’이란 형용사를 지우고 다시 보자.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명백한 위법 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선례가 될 것이다.”

가정법이다. 현실에선 그러나 이미 선례가 적지 않다. 최근 조 장관의 서울법대 동기인 검사가 글을 통해 검색의 수고를 덜어준 바 있다. 일부를 인용한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는 변호사 개업 후 수임료가 과다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퇴했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교회에서 장로 신분으로 강연한 내용이 국민감정을 자극했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박희태 법무부 장관은 딸의 편법 입학 의혹만으로 장관직을 내려놓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조 후보자가 민정수석 시절 인사검증을 담당해 장관 후보자가 되었다 사퇴한 분들 가운데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비롯해 조 후보자보다 더 무거운 의혹을 받았던 분들은 없다.”

요즘 검사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다른 예도 덧붙인다. “법무장관 하는 내내 극심한 이념갈등을 부추기고 공안정치로 야당과 국민을 겁박했고, 국민의 목소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말만 들은 ‘예스맨’이었다. 총리는 어불성설이다.”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 모두 대통령의 참모다. 수석이기 때문에 장관이 되면 안 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 다만 후보자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퇴행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

두 경우 모두 위법이 아님에도 부적격이라고 판단했다. ‘정치적 중립성 위반’이란 논쟁적 기준도 적용했다. 바로 문 대통령의 목소리다. 2015년 황교안 총리 후보자와 2011년 권재진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향해서다.

야당 지도자의 발언과 대통령의 발언이 어찌 같은 무게이겠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원칙’의 문 대통령은 그중 한 명이 아니길 기대한다. 처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걸 원칙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 견해가 다른 모든 견해보다 우선하는 정치공간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누가 포퓰리스트인가』)는 건 비민주적 태도다.

하지만 실토해야겠다. 진정 ‘나쁜 선례’들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번 임명으로 초래될지 모를 가까운 미래다. ‘피의자 법무장관’도 어쩔 수 없다는 청와대의 결기, 그리고 조 장관의 인사권, 검찰의 수사가 만들어낼 한두 달의 파괴적 속도전 말이다.

수사의 진행 정도에 따라 국민은 반복적으로 조 장관의 진퇴를 묻게 될 것이다. 조 장관의 동생? 조카? 아니면 부인? 조 장관이 만일 “그들의 일은 그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면. 조 장관이 조사를 받게 되고 더 나아가 기소된다면. 검찰의 수사 결과가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친다면. 이 과정에서 문 대통령의 “검찰은 검찰의 일, 장관은 장관 일을 하라”는 지침이 준수될지 지켜볼 것이다. 조 장관이 또 청와대가 압박 수준을 넘어, 인사권을 통해 수사라인에 변화를 주려는 유혹을 뿌리칠지도 말이다.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를 불러온 것과 같은 ‘암수(暗數)’는 또 어떤가.

매 단계에서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상식선이란 게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경지다. 상당수는 왜 이런 혼란을 자초하는지 이해도, 수긍도 못한 채 끌려 들어가는 늪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은 “대통령은 우리와 달리 수십 수 앞을 내다본다”고 했다. 수십 수 앞이 열렬한 지지자만을 위한 곳 아니길 고대한다.

고정애 정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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