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담장 60간지는 왜 뒤집혔을까..'昭和' 추적기 그 후

유동엽 2019. 9. 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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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방송 뉴스와 디지털 기사를 통해 종묘 담장에 일왕 연호가 새겨진 돌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해당 문구는 '昭和八年三月改築(소화 8년 3월 개축)'으로 '1933년 3월에 고쳐 쌓았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런 문구가 담장 9곳에 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왜 새겼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했을 뿐 정확한 상황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昭和 추적기'라는 기사 말미에 문화재청이 이유를 밝혀주셨으면 좋겠다고 썼는데, 지난달 문화재청이 진행한 용역 조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이번 조사로 해결된 궁금증과 새로 갖게 된 의문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종묘 담장을 수리했다는 내용(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담긴 1933년 4월 ‘종묘일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문화재청이 보내온 '昭和' 추적기

문화재청의 조사 의뢰를 받은 건축사사무소 강희재에서는 관련 내용이 담긴 문헌 자료를 찾았습니다. 먼저 확인한 문헌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종묘일지>입니다. 일제는 조선의 왕족과 궁궐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을 설치해 운영했습니다. <종묘일지>는 당시 '이왕직' 소속으로 종묘를 관리하던 직원들의 근무일지로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일부가 소장돼 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1933년 4월 27일 자 기록으로 '동측 외궁의 담장 10칸을 수리했다.'라는 내용이 확인됐습니다. 또, 1932년 7월과 1933년 5월에도 담장 수리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담장의 문구와 <종묘일지>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종묘 담장 수리가 실제로 이뤄졌다는 건 확인한 셈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담장석에 새겨진 바로 그 시기, 즉 1933년 3월의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문구가 있는 위치는 담장의 가장 아래쪽이라 이 부분을 교체했다면 해당 위치의 담장 전체를 새로 쌓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담장 전체를 따라 문구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해당 위치들을 같은 시기에 수리했다면 상당한 인력과 비용이 든 공사였을 텐데 3월의 문헌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의아한 점입니다. 또, 담장의 일왕 연호 9곳 가운데 유독 동쪽의 한 곳만 '소화 7년 3월(1932년 3월)'로 돼 있는데, 조사에서는 1932년 3월의 기록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쓴 60간지…종묘의 위엄은?

사실 이번 조사에서 일왕 연호에 대한 기록보다 의미 있는 발견은 '60간지'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종묘 담장에는 일왕 연호처럼 담장 아래쪽에 '임자, 을미, 신해'와 같은 '60간지'가 여러 곳에 새겨 있습니다. 존재 자체는 일찍이 알려졌지만, 자세한 내용은 파악되지 않은 채 연도를 표시한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만 있었는데 이번 조사에서 문헌 기록이 나왔습니다.

"종묘 대문의 서쪽 담장 3칸이 무너져 다시 쌓은 뒤 정식(定式)에 따라 연조(年條)를 새겨 넣었다."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처리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가운데 고종 때인 1890년 7월 29일의 기록입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종묘 담장에 있는 60간지는 모두 해당 위치를 수리한 연도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정식(정해진 방식)에 따라'라는 표현으로 볼 때 담장에 연도를 새기는 방식이 관례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관례였다면 종묘가 아닌 궁궐에서도 비슷한 방식을 썼을 법하지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에서는 이런 60간지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추정해 보자면 종묘가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태조가 경복궁보다 먼저 지었을 만큼 조선왕조에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왕이 사는 궁궐보다도 특별한 조치를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임자’를 오른쪽부터 쓰면 子壬로 돼 있어야 할 한자가 뒤집힌 담장 글자


그런데 담장에 있는 60간지 가운데 위아래가 뒤집힌 것이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듯 '壬子(임자)'가 뒤집힌 것으로 일부러 글씨를 뒤집어 새겼다기보다는 돌을 쌓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실수는 60간지가 종묘의 위엄을 드러내는 특별한 조치였다는 앞의 추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가 또 있습니다.

서체와 규격이 제각각인 60간지 담장 글자. 왼쪽부터 ‘정사/임진/을미’


위 사진처럼 60간지를 새긴 서체나 형식이 제각각이라는 점입니다. 글자 주위로 액자처럼 장식한 것도 있고, 공들여 썼다고 보기 힘든 글씨도 있습니다. 종묘의 상징성과 의미를 생각하면 이런 불규칙한 품질(?)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글자의 위아래를 바꿔놓는 실수를 해놓고 공사 과정에서 바로잡지도 않았다는 것은 종묘가 아니더라도 담당자가 벌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여전한 물음표들…종묘 담장 속 숨은그림찾기

<승정원일기>에서 담장 수리 기록이 확인된 것은 대부분 고종 때입니다. 담장에 60간지를 새기는 관례가 조선 후기에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 시기에는 특별히 담장을 수리할 일이 없었는지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전히 궁금한 점이 많기는 해도, 수리한 연도를 새기는 관례가 조선시대에 시작됐고 일제도 이 방식을 따라 일왕 연호를 새겼다는 것은 분명히 확인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이런 내용을 담은 안내판을 종묘에 설치할 예정입니다. 종묘를 둘러볼 기회가 있다면 숨은그림찾기를 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입니다. 60간지는 담장을 따라 70개가 넘게 있으니 혹시 운이 좋으면 자신이 태어난 해의 간지를 찾아 '인증샷'을 찍을 수도 있으실 겁니다.

유동엽 기자 (imher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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