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안기부·국정원..정보기관의 유구한 '민간인 사찰' 역사

허진무 기자 2019. 9. 1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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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모씨는 2014년 10월부터 지난달까지 약 5년 동안 국가정보원의 ‘프락치’로 활동하며 시민단체 ‘통일경제포럼’에 잠입해 회원들의 동향을 파악해왔다. 국정원은 학원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 곤란에 빠져 있던 김씨의 상황을 노려 접근했다. 매달 기본급 200만원과 성과급 수십만원을 지급했다. 국정원은 김씨가 통일경제포럼의 간부가 되자 서울 동작구에 자취방을 얻어주고 대표와 함께 살면서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김씨는 국정원이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100회 이상 진술서를 썼다고 했다. 진술서를 쓴 날에는 남성 직원들과 함께 성매매를 했다고도 했다. 김씨는 국정원이 자신을 통해 민간인 사찰을 했다며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했다. 권익위는 김씨를 공익신고자로 인정해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을 했다. 김씨는 지난 4일부터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고 있다. 김씨는 “정권이 바뀐 것을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며 “문재인 정부를 믿었지만 국정원은 계속 건재하게 일하고 있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국가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하는 중대 범죄다.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국가정보원은 광범위한 사찰을 통해 수차례 정치에 개입한 전력이 있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도 각종 대공·공안 수사를 빌미로 군사 독재정권에 부역하며 민간인을 사찰하고 간첩 사건을 조작해왔다.

2005년 8월 국정원 ‘미림팀’ 팀장 공운영씨의 경기 성남시 정자동 자택을 검찰이 압수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1월 안기부를 개편해 국정원으로 출범시켰다.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의 부정적인 과거를 쇄신하기 위해 전체 인원 10분의 1에 해당하는 581명을 해고하면서 고강도 개혁을 시도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김 대통령이었지만 그가 집권했던 시기에도 국정원은 민간인 사찰을 계속됐다. 집권 첫해부터 안기부부터 국정원까지 이어진 불법감청 의혹이 있었다.

국정원은 2000년 10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미림팀’을 운영하며 대규모 불법 감청을 저질렀지만 2005년이 돼서야 퇴사한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가 언론에 폭로하면서 진상이 드러났다. 당시 국정원은 불법감청 장비 ‘R2’를 개발해 대통령 친인척, 고위공직자, 시민단체 활동가, 노동조합 간부 등 1800여명을 불법 사찰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활동한 이종찬, 천용택, 임동원, 신건 국정원장 모두 불법감청 관련 조사를 받았다. 이중 임동원·신건 전 원장만 불법 감청을 묵인하고 방관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이들은 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지만 형 확정 4일만에 특별사면돼 논란이 일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국정원은 인터넷 활동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패킷 감청’을 저질렀다. 패킷 감청을 하면 인터넷 회선을 통하는 불특정 다수인의 모든 정보가 패킷 형태로 무차별 수집돼 수사기관에 전송된다. 해당 회선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로그 기록과 인터넷 검색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정원은 2004년부터 2년4개월 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KT 인터넷 전용 회선을 감청했다.

정보기관의 ‘패킷 감청’이 제재를 받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는 패킷 감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하며 국회에 인터넷 감청을 통제할 법을 2020년 3월까지 만들라고 주문했다. 헌법소원은 2011년 3월 전국교직원노조 소속의 한 고등학교 도덕교사 김모씨가 냈다. 김씨는 국정원이 2010년 12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자신에 대한 패킷 감청을 한 사실을 알았다. 헌재가 결정을 미루는 동안 김씨는 2015년 9월 간암으로 숨졌다. 헌재는 2016년 2월 김씨의 사망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했지만 김씨와 한 사무실을 쓰면서 같은 회선을 이용한 목사 문모씨가 그해 3월 다시 헌법소원을 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4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은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의 지시로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방첩국 산하에 ‘포청천’이라는 공작팀을 꾸려 한명숙 전 국무총리,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등 당시 유력 야당 정치인과 민간인을 사찰했다. 이명박 정부와 갈등을 빚던 이방호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 황영철 자유한국당 의원 등 여당 의원들도 사찰 대상에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 전 원장은 2011년 4월 불법사찰 의혹을 폭로한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게 ‘입막음’ 자금으로 국정원 특수활동비 5000만원을 횡령해 전달했다.

국정원은 대선 승리를 위해 주요 포털사이트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조직적으로 댓글을 달아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다. 2013년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장이던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 사건을 수사하다 대구고검 검사로 좌천됐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도 ‘혼외자’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자 자진 사퇴했다. 국정원 직원 송모씨는 윗선의 지시를 받아 서초구청 공무원과 공모해 학교생활기록부를 조회하는 등 채 총장의 혼외자 정보를 수집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까지 9년 동안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압력과 불이익을 줬다. 이 사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17년 6월 국정원이 개혁 차원에서 만든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의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국정원 심리전단팀은 배우 문성근씨와 김여진씨의 나체 합성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하면서 이들이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인 것처럼 조작하기도 했다. 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인물은 배우 문성근·권해효·유준상, 방송인 김미화·김구라·김제동, 가수 윤도현·신해철·안치환, 영화감독 이창동·박찬욱·봉준호 등 82명에 달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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