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군국주의의 또 다른 광기..인간기뢰 '후쿠류' 자살특공대
일본 해군이 일본 본토, 특히 도쿄만을 사수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했다. 그러나 불과 패망 3개월 전 급조한 데다가 훈련 과정에서 사고가 빈번히 발생해 실전에 투입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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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자’
미 해군이 작성한 1946년 1월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초 일본 해군은 44년 이 특공대의 개념을 만들었다. 본격적인 잠수복과 공격무기 개발은 45년 2월부터 일본 해군의 거점인 요코스카(横須賀)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 일 해군성은 미군의 본토 상륙이 임박해오자 부대 창설에 속도를 냈다. 총 6000명 단위 부대를 그해 9월 30일까지 만들어 10월 15일쯤 실전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
후쿠류는 가미카제의 예비 병력 성격이 강했다. 45년 3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를 기점으로 가미카제 출격기가 거의 소진되자 남은 특공대원을 후쿠류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해저에서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자’가 선발 조건에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잠수 상태에서 장시간 대기해야 하는 작전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때문에 비교적 책임감이 강한 장남들이 대거 선발됐다는 증언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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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m 기뢰봉에 성형작약탄 장착
후쿠류 대원은 검정고무 재질의 잠수복을 입고 등에 산소통 2개(각 3.5L)를 멨다. 해저 작전에 용이하도록 납으로 만든 허리띠를 메고 납으로 엮은 짚신을 신는 등 잠수복 무게를 높였다. 장비 전체 중량은 약 70㎏에 달했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15시간 동안 임무를 할 수 있도록 잠수 장비를 제작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실제 대기 가능시간은 5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잠수 장비는 최대 수심 15m의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걸어서 이동하고 기뢰봉을 써야 한다는 특성상 작전 수심은 4~6m 정도였다. 3.3m 길이의 긴 대나무 봉에 기뢰를 장착해 다가오는 적함에 부딪혀 폭발시킨다는 개념이었다. 기뢰로는 15㎏의 성형작약탄(폭발력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지향성 폭탄)인 ‘5식격뢰’가 사용됐다. 원리 상 머리 위로 지나가는 함정이어야만 폭발이 가능한데, 이 경우 후쿠류 대원은 거의 100% 사망하게 된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장시간 잠수가 가능하게 고안한 반순환식 산소공급기, 일명 ‘청정캔’이었다. 가슴에 장착한 청정캔 안에는 독성 물질인 가성소다(양잿물)가 들어있었다. 숨을 내쉴 때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실험 결과 3, 4차례만 호흡해도 탄소가스 중독으로 실신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또 통 자체가 양철 재질이어서 바위에 부딪히면 쉽게 파손됐다. 이때 바닷물과 가성소다가 반응하면서 만들어진 고온의 독극물을 들이킨 특공대원은 대부분 사망했다. 스즈키는 방송에서 “청정캔에 구멍이 뚫리면 수압으로 물이 들어와서 머리 위부터 (독극물 액체가) 내려오게 된다”며 “그걸 코로 들이마시면 체내로 극약 성분이 퍼지면서 괴로워하다가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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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광기가 빚은 무모한 작전
본토 사수를 위한 최종 병기인 후쿠류를 누가 정식으로 제안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군사전문가들은 당시 전쟁 지휘부인 대본영의 광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로 후쿠류를 들기도 한다. 자살공격을 떠나 누가 보더라도 애당초 불가능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시계가 나쁜 바닷속에서 적선의 움직임을 살피며 자신보다 2배 이상 긴 기뢰봉을 휘젓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조류 탓에 해저에서 걷는 일조차 힘들었다는 것이 당시 대원들의 증언이다. 상륙작전에 앞서 미군 함포 사격이 집중될 경우 기뢰 폭발로 촘촘히 대기 중이던 후쿠류 대원들이 한꺼번에 몰살되는 상황도 예견 가능했다.
전후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는 스즈키는 방송에서 “사람의 목숨은 둘이 아니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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