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칼럼] 굿바이 조국

이철호 2019. 9. 1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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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법·반칙에 거짓말까지 들통
불법만 따지면 검찰 공화국 돼
좌우 거치며 값비싼 학습 비용
이제라도 조국은 떠나 보내야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요즘 좌파 진영은 조국 사태를 놓고 “계급 갈등”이라느니 “세대 갈등”이라느니 헛다리를 짚고 있다. 한마디로 논점 흐리기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문재인 대통령이 잘못된 인물을 법무부 장관에 앉힌 데 있다. 조 장관 일가는 딸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온갖 편법과 반칙을 일삼았다. 그동안 SNS에 늘어놓았던 근사한 말과 정반대여서 더 미운 털이 박혔다. 하지만 “우리는 속았어요”라는 위선의 단계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지금 우리 사회가 분노하는 지점은 거짓말이다. 셀프 기자간담회와 인사청문회에서 늘어놓은 변명들이 연일 검찰 수사에서 거짓말로 들통나고 있다. 딸의 단국대 의대 논문은 “고려대 입시에 안 냈다”고 우겼지만 고려대 증빙 자료에는 9번째로 기재된 것으로 드러났다. 동양대 컴퓨터는 “아내가 집에서 일하려 갖고 나왔다”고 둘러댔으나 증권사 직원을 시켜 집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까지 바꿔치기한 게 탄로 났다. 조 장관은 과거 운동권 시절처럼 목표가 선하다면 거짓말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눈치다. 놀라운 뻔뻔함이다.

뜬금없이 나선 조연들은 정치적 치명상을 입었다. 법무부 차관과 검찰국장은 윤석렬 검찰총장을 패싱하는 꼼수를 내놓아 몰매를 맞자 “개인 아이디어였을 뿐”이라며 꼬리를 내렸다.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도 동양대 총장 압박 전화에 대해 “농담이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법무부 역시 ‘검찰 피의사실 공개 금지’를 “훈령 개정을 위한 초안이었을 뿐”이라고 물러섰다. 모두 정당성 없는 인사를 덮으려다 스텝이 꼬여버린 것이다. 이제 어떤 사법개혁 카드를 내놓아도 국민적 공감은커녕 의심만 살 수밖에 없다. 이렇게 타락한 수사 방해 공작은 군사독재 시절에도 흔치 않았다. 86운동권이 괴물과 싸우다가 스스로 괴물이 돼 버렸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문제적 발언은 문 대통령이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명백한 위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뒤집어 말하면 본인의 위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명을 강행해 좋은 선례를 세웠다는 뜻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불법은 아니더라도 비윤리적 행위를 하거나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인사는 도중에 낙마시키는 나름의 불문율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더는 인사 검증이나 국회 인사청문회는 필요 없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거꾸로 검찰의 전면적인 정치 개입을 정당화시켜 버렸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윤석렬 검찰이 전격 압수수색에 나서자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난도질했다. 하지만 인사권을 통째로 검찰에 넘긴 것은 대통령 자신이다. 앞으로 장관을 임명하면 야당은 자동으로 고소·고발을 하고 결국 검찰에 의해 위법 여부를 가릴 수밖에 없다. 검찰 권한을 제한하겠다던 문 대통령이 정작 검찰 권한을 더 비대화시켰다. 가장 걱정스러운 일은 조 장관이 구속기소 되더라도 국가공무원법 69조(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받지 않는 한 계속 집무)를 방패막이 삼아 대법원 판결 때까지 2년 이상 구치소에 들어앉아 검찰 인사를 주무르고 사법개혁의 칼을 휘두를지 모른다는 점이다. 법률 만능주의가 빚은 코미디같은 법치주의 풍경화다.

예전에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이란 영화가 있다. 여기의 대사만큼 민주주의와 독재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풍자를 보지 못했다. “여러 명이 × 꼴리는 대로 하면 민주주의고, 한 놈만 × 꼴리는 대로 하면 독재여.” 추석 연휴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조 장관 임명에 대한 찬반이 36:57(MBC)로 20%포인트 이상 벌어졌다. 그렇다면 임명 강행은 독재일까 민주주의일까. 문 대통령과 조 장관은 전직 민주화 투사일지 모르지만 현직 민주주의자는 아닐 듯싶다. 적어도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법률로 재단하기에 앞서 상대편에 대한 존중, 공동체 내부의 합리적 상식에 대한 믿음을 기본으로 한다.

이번 사태로 민주주의는 퇴보하고 신뢰자산은 현저히 훼손됐다. 그나마 중도층이 급팽창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사회가 최순실 사태와 탄핵에서 일그러진 보수에 실망했다면 지금은 좌파의 비뚤어진 민낯을 목도하고 있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좌우를 오가며 값비싼 사회적 학습비용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박근혜·문재인의 당선에는 박정희·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채 의식이 깔려있다. 이제라도 부채의식 없이 민주주의를 논하고 어떻게 제대로 된 리더를 뽑을지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당장은 조국 사태 마무리가 우선이다. 치열한 수사가 검찰이 할 일이라면 대통령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야당 대표 시절 이완구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에 대해 “우리 국민은 국격에 맞는 총리를 원한다”며 “여야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해 결정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총리 운명도 여론에 맡기자고 했는데 하물며 법무부 장관쯤이야…. 사실 격낮은 강남좌파 한 명 때문에 온 사회가 한 달 넘게 열 받으며 서로 치고받는 것은 에너지 낭비이자 슬프고 화나는 일이다. 이제 입을 모아 함께 외칠 때가 된 듯싶다. “굿바이, 조국!”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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