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에 녹음기 들고갔다 공갈범으로..환자는 누구를 믿어야 하나

류인하 기자 입력 2019. 9. 21. 15:10 수정 2019. 9. 2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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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환자는 수술대에 누운 순간부터 수술이 끝날 때까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의료진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수술을 했을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인격적 행위와 성희롱, 성폭력, 유령수술 등 불법행위는 누군가의 양심고백이 없는 한 환자 혼자 밝혀내기 어렵다.

2013년 서울 강남의 한 대형 성형외과에서 양악수술을 받은 한 남성은 환자복에 소형 녹음기를 숨기고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을 두고 의료진들이 각종 비하발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의료진들은 자신의 성기를 놓고 “포경수술은 안 했네. 얼굴은 많이 했는데”라고 말했다. 이어 “얘 약간 제 생각에는 그거 준비하는 거 같아요. 트랜스젠더”, “미친X, 나도 이걸로 밥벌이하고 있지만 미친X라니까요. 내 아들이면 호적 팠을 거예요”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게다가 자신을 진료한 의사가 아닌 다른 의사가 집도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도 포착됐다. 유령수술과 환자 성희롱 현장을 녹음기로 적발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유학생 정희원씨(가명)도 2013년 3월 얼굴 팔자주름 리프팅 수술과 가슴지방 이식수술을 받기 전 작은 종이가방에 어학용 녹음기를 들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앞서 1차로 받았던 수술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수술과정을 녹음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정씨는 그러나 이 녹음으로 현재까지도 법정 다툼을 벌이며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녹음되어 있는 적나라한 대화들

녹음기에는 간호사와 의사가 자신의 벌거벗은 신체를 놓고 비하하는 대화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 간호사가 제모한 정씨의 성기를 놓고 “아, 남자친구 없을 거야”라고 하니 또 다른 간호사가 “없죠, 없죠, 말하는 거 봐봐 우악스러워”라고 답했다. 정씨의 피부탄력을 놓고도 “온몸에 탄력이 없다” “(탄력이 없는데) 성격은 왜 이렇게 더러워?” “탄력이 없으면 성격이라도 좋아야 할 거 아니야?” “이 사람 결혼 못했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정씨의 얼굴에 대해서도 “못생긴 얼굴인데 자기 불만족이 너무 많은 사람인 거겠죠? 그래서 원래 못생긴 애들이 더 못됐어요”라고 비하했다. 얼굴 리터치 시술을 하는 과정에서 남자 의사들끼리 “남자가 없어서 그래. 이 여자 장난 아니야. 욕구불만을 이제 이런 식(성형수술)으로 푸는 거지. ○○이(의사 이름) 같은 남자친구가, 애인만 있으면 끝나는데” “왜 제가 나오나요?” “희생정신(웃음소리)” “○○이 젊고 힘 좋고, 밤마다(웃음소리)” 등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판결문 정본에 첨부된 녹취록 발췌)

정씨는 사과를 요청했지만 받지 못했다. 그는 한 달 뒤인 2013년 4월 법무법인을 통해 “1·2차 수술비와 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머물면서 지출된 외국 내 월세, 위자료 명목으로 8800만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내용증명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병원 측의 맞고소였다. 애초에 정씨가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수술실에 녹음기를 들고 와 대화내용을 녹음한 뒤 돈을 뜯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사건을 맡았던 수사기관 역시 정씨를 공갈미수 혐의로 기소했다. 그가 수술실에 녹음기를 가지고 들어간 것 자체가 공갈을 목적으로 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씨가 의료진 8명을 상대로 낸 고소에 대해서는 전부 무혐의 불기소처분이 내려졌다. 정씨가 설령 공갈을 목적으로 했더라도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놓고 각종 비하발언을 쏟아낸 것조차도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환자는 누굴 믿고 수술을 받을까

경찰이 작성한 기소의견서에 따르면 “피의자들(의료진)이 수술하는 과정에서 ‘남자친구 없을 거다, 미친X라는 등, 징글징글하다’는 식의 신체에 대해 폄훼하는 대화, 의사가 음부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겼다’는 내용의 대화를 한 사실은 인정되나…(중략) 고소인의 진술 외에 달리 피의자들의 범죄혐의를 인정할 만한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아 혐의점을 인정키 어려워 각 불기소(혐의없음) 의견임”이라고 기재돼 있다.

그 사이 정씨는 공갈미수범이 됐다. 1심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벌금 300만원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정씨가 병원을 상대로 한 일련의 행위들에 공갈죄로 볼 만한 사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오히려 “수술에 참여한 의료진들이 전신마취 상태로 수술용 팬티만 착용하고 수술대에 누워 있던 정씨의 성기 부분을 함부로 들여다보면서 이를 성적으로 비하하고 함께 조롱했다”면서 “정씨의 가슴과 다리 등 신체부위를 조롱하고 심지어 남자 의사들이 정씨를 성적으로 희롱하는 내용의 언사까지 주고받은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의료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온전히 맡긴 채 전신마취를 당하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상대로 병원 측이 이 같은 행위를 한 것은 비록 정씨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 있었더라도 정씨의 인격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성마저 훼손한 행위로 매우 비난받을 만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른 정씨의 손해배상 청구는 정씨가 당연히 할 수 있는 그의 권리라고 판단했다. 정씨는 공갈미수범으로 재판에 넘겨진 지 8개월 만인 2014년 10월 대법원 무죄 확정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씨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순간에 공갈미수범으로 몰려 유학도 포기하고 현재까지 소송비용 등으로 2억원의 빚을 진 상태다. 지금은 그 돈을 갚기 위해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자신의 사연을 올리기도 했다. 정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환자가 수술실에 녹음기를 들고 가는 행위가 불법성 여부를 떠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6년 전만 해도 자기 의지로 성형수술을 받으러 온 여성이 수술실에 녹음기를 들고 갔다는 이유로 ‘꽃뱀’, ‘공갈범’으로 몰렸었다”면서 “지금도 수술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고, 디자이너로서의 꿈마저 잃은 상태”라고 했다.

정씨는 2018년 의료진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지난 5월 1심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의료진은 정씨를 상대로 1000만원을 위자료 명목으로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정씨는 민사재판에서 진료를 맡았던 의사가 아닌 사전에 고지되지 않은 의사가 자신의 수술을 했다며 유령수술 의혹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의사 A씨가 정씨의 동의를 받지 않고 의사 B, C를 수술에 참여시킴으로써 설명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은 양측의 항소로 오는 10월 항소심 첫 재판을 앞두고 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야 끝날 싸움인 셈이다.

그는 수술실에 녹음기를 들고 간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정말 많이 후회한다. 내가 아무리 의료사고 우려로 녹음기를 들고 갔다고 해도 변호사도, 판사도, 검사도 온전히 믿어주지 않았다.”

수술실은 오늘도 ‘성역’처럼 운영되고 있다. 환자가 병원의 동의 없이 수술실에 녹음기를 들고 가는 것은 현재로서는 처벌된 사례가 없지만 엄연히 불법이다. 제3자 간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술실 CCTV 의무설치 법안도 통과되기 어려운 상태다. 그렇다면 환자는 누구를 믿고 수술받아야 하는 것일까.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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