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제5의 진흥왕순수비' 감악산비 글자, 350년 만에 읽어냈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입력 2019. 9. 24. 03:01 수정 2019. 9. 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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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광(光), 벌(伐), 인(人)…. 감악산 비석에서 몇자 읽었어요.” 얼마전 서예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대전대 서화연구소책임연구원)와 연락을 취하던 중 ‘감악산 고비 운운’하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그러면서 손 박사는 “마침 삼국시대 석비와 관련된 논문을 썼노라”면서 오는 30일 곧 게재될 학술지 논문(<한국사상과 문화> 99집)을 보내줬다. 손 박사는 논문에서 감악산비를 진흥왕순수비인 북한산·황초령·마운령비와 함께 진흥왕대(재위 540~576) 혹은 진평왕대(579~632)에 조성된 신라고비로 분류해놓았다.

기자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10여 년 전 감악산고비가 ‘제5의 진흥왕순수비’(앞서 거론한 3곳과 경남 창녕의 진흥왕척경비 포함)일 가능성을 취재했던 경험 덕분이었다. 그런데 손 박사는 “예전(1999년)에 감악산 정상에서 뜬 비석탁본에서 몇 자를 판독했다”는 말을 꺼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왜냐면 감악산비는 글자는 있었지만 판독할 수 없는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져왔기 때문이다. 조선 중후기의 문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은 1666년(현종 9년) 감악산 정상에서 올라 “석단 위에 비석은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됐다”(<기언> ‘하·산천 상·감악산기’)고 썼다. 1982년 동국대조사단이 학술조사를 벌였지만 어렴풋 12~13자의 자흔(글자흔적)만 확인됐다.

감악산비문에서 등장하는 벌(伐)자는 중국 감숙성 무위에서 확인된 무위의 무덤에서 출토된 ‘무위의례’ 목간의 ‘벌’자와 유사하다. 가운데 一자처럼 그은 획의 양끝이 살짝 올라가있다. 이런 서법은 6세기대 신라고비에서 흔히 나타나며 삼국시대가 끝날 무렵엔 사라진다. |손환일 박사 제공

당시 동국대 조사단의 보고서는 “북한산 순수비와 외관 및 규모 면에서 이상하리만치 흡사하다”면서 “그러나 당시 임창순·고병익·황원구·남도영·이병도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비문을 판독하려 했지만 글자의 흔적만 겨우 12~13자 확인했을 뿐”이라고 썼다. 이 보고서는 “삼국시대 고비는 틀림없지만 ‘기적적으로’ 새로운 자료나 판독방법이 나오지 않으면 판단은 유보하는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해~임진강~서울 축선에 자리잡고 있는 감악산 정상에 우뚝 선 감악산비. 글자가 마멸된 몰자비로 알려져 왔다. 신라의 순수비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현재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돼있다. 국가 지정문화재 승격이 시급하다.

이렇듯 최소한 350년 넘게 ‘몰자비’로 인식됐던 감악산 비석에서 몇 자를 읽어냈다면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어떤 글자냐”고 되물었더니 손박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석자, 즉 광(光)자와 벌(伐)자, 인(人)자를 표시한 자료를 보내주었다. 기자가 “삼국시대 글씨체가 맞냐”고 물었더니 손 박사는 “예서 기법이 가미된 삼국시대 해서체가 맞다”고 확인했다.

“감악산비의 ‘벌(伐)’자를 보면 가운데 一자 처럼 그은 획의 양끝이 살짝 올라갔는데, 이런 필법은 삼국시대가 지나면 없어집니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임진강. 삼국시대땐 기마부대가 한국전쟁 땐 인해전술로 무장한 중국군이 건너올만큼 수심이 얕은 지점이다.

손 박사는 “도드라지게 구별되는 글자만 3개 찾은 것”이라면서 “묻어두었던 감악사비 탁본을 꼼꼼히 들춰보아 글자를 더 읽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판독 가능한 글자 중에는 ‘중(中)’자와 ‘김(金)’자도 있다고 전했다. 손 박사는 “겨우 몇 자를 읽은 것으로 전체적인 석비 내용과 의미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판독한 ‘벌(伐)’자는 의미심장한 글자다. 다른 나라의 땅을 정벌했다는 의미이거나, ‘이벌찬’ 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낱말일 수도 있다. 손 박사는 “관등명이라면 앞쪽이나 뒤쪽에 보이는게 신라 고비의 상례”라며 “비석의 한가운데서 보인 감악산비의 ‘벌(伐)’자는 ‘어느 땅을 정벌했다’는 의미의 동사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신라의 임금(진흥왕 혹은 진평왕)이 영토를 임진강 유역까지 넓힌 기념으로 새 영토가 훤히 보이는 감악산에 올라 비석을 새긴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북한산과 창녕, 황초령, 마운령의 경우를 보라. 한결같이 중요한 국방시설 인근지역이다. 창녕비(561년) 인근의 화왕산성은 낙동강 남쪽 의령과 함안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고, 마운령비 인근 운시산성은 청진과 함흥을 잇는 통로를, 황초령비 인근 중령진은 강계와 함흥을 잇는 통로를 각각 통제하는 곳이다. 물론 북한산비가 있는 북한산성은 개성과 서울을 잇는 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요충지다.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삼각산) 비봉에서 확인한 진흥왕순수비. 크기와 규모가 감악산비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악산비는 어떤가. 감악산 앞에는 삼국시대부터 요충지였던 칠중성이 버티고 있다. “638년(선덕여왕 7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들이 산골짜기(감악산)로 들어갔고, 대장군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선덕여왕조’)는 기록이 있다. 또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년·고구려 보장왕 19년) 고구려·신라간 전투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신라의 칠중성 현령 필부가 고구려군에 맞서 20일간이나 성을 지켰다, 고구려가 포기하고 퇴각하려 했지만 반역자 대사마 비삽이 은밀히 고구려와 밀통해서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공격하라’는 편지를 보냈다…고구려군이 화공(火功)으로 공격했다. 필부는 고구려군의 화살을 맞아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릴 때까지 싸우다 죽었다.”(<삼국사기> ‘열전·필부전’)

감악산 정상에서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난 1951년 4월 이곳은 영국군·중국군의 치열한 국제전쟁터가 된다. 캐슬고지로 명명된 칠중성을 지키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중국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 공세를 3일간이나 지연시켜 중국군의 서울 재점령을 막았다. 멀게는 1400년 전부터 가깝게는 60여 년 전까지 칠중성과 감악산이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을 받은 이유가 있었다. 이곳을 흐르는 임진강이 유난히 얕아 사람은 물론이고 말(삼국시대)과 탱크(한국전쟁)가 도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악산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는 개성 송악산과 남으로는 삼각산까지 훤히 조망하며 통제할 수 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뒤 북한산 비봉 정상(556m)에 순수비를 세웠다면 황해도~한강을 잇는 지름길인 임진강 유역을 확보한 뒤 바로 감악산 정상에 같은 성격의 비석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짙다.

아닌게 아니라 감악산 비석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너무도 흡사하다.

강원 철원 자연 바위로 조성된 고석정. 고석정 윗부분에 동굴이 있다. 고려 때의 국통 무외 스님은 이 동굴에 신라 진솔왕의 비가 있었다고 전했다.

감악산비는 높이 170㎝, 너비 74㎝, 두께 15㎝이다. 북한산비는 남아 있는 비신의 높이 154㎝, 너비 69㎝, 두께 15㎝이다. 석재도 둘다 화강암이다. 나중에 얹어놓았다는 덮개돌(감악산비)을 빼면 두 비의 형태와 규모는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어느 누가 명문도 없고, 또 별 의미도 없는 비석을 해발 675m 산 정상에 올려 놓았겠는가.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은 “감악산과 칠중성은 신라가 소사(小祀·작은 규모지만 국가차원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했다. 신라는 초창기 왕경(경주)인근에서 대사(大祀)를 지냈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사(中祀)-소사 등으로 국가제사를 추가했다. 북한산도 소사를 지낸 곳이다. 따라서 감악산 소사는 북한산과 함께 신라가 한강 유역~임진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히는 과정, 즉 6세기 중엽~7세기 초엽 추가한 제사일 가능성이 짙다. 이 시기는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강과 임진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까지 영역을 넓힌 기념으로 순수비를 세운 시기와 일치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강원 철원 고석정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진솔왕(진평왕 비정)의 비석’에 착안해서 감악산 고비 역시 진평왕(재위 579~632)순수비로 여기기도 한다. 진평왕이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차지한 뒤 할아버지(진흥왕)를 벤치마킹해서 순수비를 건립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가설이다.

그렇다면 상당부분 판독이 가능했던 다른 순수비와 달리 감악산비는 왜 그렇게 ‘몰자비’로 전락했을까. 오랜 풍우난설로 자연 훼손된 이유도 클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신라시대부터 왕실 및 공경사대부는 물론 일반백성들의 기도처였던 것도 주요 원인이 됐을 것이다. 정상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이 비를 훼손했을테니까….

이 대목에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했을 때의 기록을 떠올린다. 19세기초까지 북한산비는 ‘무학대사비’나 혹은 ‘나말의 고승인 도선국사비’로 구전됐다. 그러나 1816년(순조 16년) 7월 북한산 비봉에 오른 추사가 비석의 탁본을 떠내 살펴본 결과 진흥왕의 ‘진(眞)’자와 순수(巡狩), 경(境)자를 읽어냈다. 추사는 “1200년만에 무학비라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완당전집> 1권)고 기뻐했다.

순수비가 자리잡고있는 지점들은 한결같이 요충지였다.

감악산비는 어떨까. 지금까지 ‘몰자비’로 인식됐고, 지금에 와서는 더더군다나 읽기 어렵게 된 비석이 됐지만 추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 1999년까지의 탁본이 남아있고, 또 한 연구자가 읽을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진 몇글자를 찾아냈으니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얼마전 3D 스캔 이미지를 활용해서 판독이 불가능했던 포항 중성리비 글자들을 읽어냈다. 감악산비도 최첨단 기술로 몇글자 더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진흥왕(진평왕) 순수비임을 알리는 진(眞)자나 순(巡), 수(狩), 경(境) 자같은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면 상황 끝이다. 무엇보다 산정상에서 자연의 풍우난설(風雨亂雪), 인공의 손길로 훼손되는 감악산비를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지금 감악산비는 파주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됐을 뿐이다. 삼국시대, 그것도 진흥왕(진평왕) 순수비로 추정되는 비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두지않고 저렇게 둘 것인가. 후손들의 무심이 안타깝기만 하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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