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상위 1%를 위한 '민부론'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2019. 9. 2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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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최근 자유한국당이 내년 4월 총선과 차기 대선을 겨냥해 당의 경제정책 방향과 과제를 담은 ‘2020 경제대전환: 민부론’을 발표하였다. 공안검사 출신의 삭발한 당 대표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 흉내를 내면서 정책을 발표할 때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래도 제1야당이 그나마 정책으로 국민 평가를 받겠다고 나선 것은 격려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이 ‘민부론’에서 제시한 경제정책의 방향과 과제를 꼼꼼히 살펴보면 이름만 민부론일 뿐 실상은 ‘시장근본주의’라는 흘러간 유행가의 ‘표절’이었다. 현재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경제개혁의 과제를 전혀 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과거 자신들이 집권당 시절 주장하면서 실패하였던 정책들을 포장만 바꾸어 다시 내놓은 것들이 태반이다. 낙수(落水)효과는 유수(流水)효과로 이름만 바뀌었다. 규제완화, 유연한 노동시장, 법인세와 상속세 인하 등은 우리 국민들에게 이미 친숙한 시장근본주의의 레퍼토리들이다. 트로트를 약간 다르게 각색하여 제목을 바꾼다 한들 트로트가 랩이 되지는 않는다. 하물며 랩이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담을 리 없다.

민부론은 거의 모든 것을 일단 안티 문재인에서 출발한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 저성장과 양극화 심화 등 한국 경제를 총체적 위기에 빠트렸”다고 진단하면서 “민간과 시장 주도의 자유시장경제로 대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경제가 저성장과 양극화에 빠진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를 ‘양극화된 저성장의 덫’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런데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제성장률은 노무현 정부 5%대, 이명박 정부 3%대, 박근혜 정부 이후 2%대로 계속 하락하여 왔다. 불평등과 양극화는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어 온 현상이다. 우리 경제가 ‘양극화된 저성장의 덫’에 빠진 이유는 그 역사적 시효를 다하였음에도 지속되어 온 재벌 위주의 성장정책과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확산된 시장근본주의 탓이 크다. 촛불혁명 이후 양극화를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고 문재인 정부의 ‘포용적 성장’은 이런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양극화된 저성장의 덫을 문재인 정부 탓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자신들의 과오로 화재가 난 집에 불 끄러 달려온 소방수를 보고 당신 때문에 화재가 났다고 비난하는 격이다. 사실 자유한국당도 자신들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양극화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그 해소를 위해 소득주도성장에서 제안하는 정책과 비슷한 내용의 정책들을 여러 번 제안한 바 있었다.

자유한국당이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 문재인 정부를 ‘사회주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 시장근본주의라는 ‘흘러간 노래’를 제목만 바꾸어 다시 트는 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말했던 자신들의 과거 정부보다도 못한 퇴행적 경제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큰 정부’가 우리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너무 커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 도처에 포진해 있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집요한 방해에 의해 그리고 일부 정책담당자들의 기회주의로 인해 과감한 경제구조개혁과 제대로 된 재정정책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저성장이라는 뉴노멀 시대에 대비하여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재정을 확대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역사적 시효가 끝난 시장근본주의와 퇴행적인 불평등 성장모델을 주장하는 민부론은 시대착오적이다.

민부론 집필에 참여한 교수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은 지난 정권에서 경제정책 입안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사람들이다.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해서는 소득으로 소득을 증가시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느니 소득주도성장론은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이론’이라고 하면서 비판의 날을 세우던 사람들이다. 그러던 그들이 정말로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민부론’을 내놓으면서 적절한 인용도 없이 시장근본주의를 표절하고 있다.

민부론은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은 5만달러로, 중산층 비율은 70%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다. 2019년 현재 3만달러인 국민소득을 11년 만에 5만달러가 되게 하려면 연평균 성장률이 4.8%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상식 있는 경제학자가 주장할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 중산층(소득이 중위소득의 50~150%에 놓인 계층)의 비율감소는 2013년 이래 지속된 현상으로 이는 한계적 상황에 놓인 가구의 증가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데 시장근본주의적 정책으로 이 비율을 어떻게 70%로 회복시키겠다는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자유한국당은 민부론이 특정 계층이 아닌 국민 ‘모두’를 위한 통합의 경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장근본주의 경제정책은 국민 99%의 희생하에 상위 1%에게 막대한 소득과 부를 가져다주었음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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