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 비판 일본 학자 "조선인이 그렇게 가난해졌는데 수탈·착취 없었다니"

김종철 입력 2019. 9. 28. 09:36 수정 2019. 9. 2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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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인터뷰
<일본학자 본 식민지 근대화론> 저자 도리우미 유타카

일제의 투자로 조선 발전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 파헤쳐
"일제, 조선을 구조적으로 수탈
모든 돈은 일본인에게 흘러가
일본이 나빴다고 말할 수밖에"

"처음엔 일본을 세계 최고로 생각
공부해보니 보편과 거리 멀어"

▶ 일제 식민지 36년 동안 일본이 조선인을 수탈하거나 착취한 적이 없고, 도리어 조선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힘입은 탓인지 최근 보수파 집회에서는 심지어 일장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일본인 학자가 식민지에 대한 수탈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파헤친 책을 냈다.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도리우미 유타카를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학문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도록 말이다.” 일본인 학자 도리우미 유타카 박사가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인터뷰를 위해 자리를 잡자 도리우미 유타카(57) 박사는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다. 자신의 책(<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이 아니라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쓴 <반일 종족주의>였다. <반일 종족주의>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 조선의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고, ‘위안부’에 대해서도 개인의 영업이었지 일본군의 전쟁범죄가 아니라는 등의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반일 종족주의>를 다 읽었나?

“대략 읽어봤다. 2003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도 식민지 근대화론이 화제였다. 그때도 김낙년, 이영훈 교수 등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진짜 그들이 대단하긴 하다. 한국인들이 아무리 반발하고 비판해도 ‘나는 학자의 양심에 따른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은 어쨌든 용기다. 그 책에 개인적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내가 논문을 쓰고 책을 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존의 식민지 수탈론에 관한 것 아니냐면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반일 종족주의>가 나오고 나서는 내 논문에 주목하더라. 그리고 일본 우익들의 주장이 바보 같은 말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반일 종족주의>가 역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책 저자들과는 별로 싸우고 싶지 않다.(웃음) 토론을 통해 (그들을) 바꿔가려고 한다.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다.”

일본인 주머니로 들어간 일제의 투자

―어떤 점이 그랬나?

“그들 주장에서 받아들일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일제 때 무력을 동원한 수탈은 없었다는 점이 그런 것이다. 토지조사나 산미증식(쌀 생산 확대) 사업 때 조선인들에게 강제적으로 땅이나 쌀을 뺏은 적은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료로 볼 때 맞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조선왕조가 소유하던 토지를 일제가 압수해서 동양척식회사에 넘긴 뒤 소작인들이 소작권을 보호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들에게 땅을 그냥 압수한 것은 없었다. 일본인 지주들이 가장 많이 토지를 확보한 때는 1926년에서 1935년 사이인데 그때는 토지조사 사업과는 상관이 없다. 쌀도 태평양전쟁 시기에 강제 공출이 이뤄진 때를 제외하고는 강제적으로 처분하게 하거나 빼앗아 간 적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학자들의 연구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 의문은 수탈이나 착취가 없었는데 왜 조선인들이 그렇게 가난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일제 때 한국에 온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거나 직업이 없는 실업자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 부자가 됐다. 조선인은 더 가난해졌는데 일본인은 거의 전원이 큰 부자가 됐다는 게 너무 부자연스럽고 이상하지 않나. 그런 수수께끼를 공부를 통해 나름대로 풀었다. 결국 수탈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제의 구조적인 수탈 구조를 파헤친 도리우미 유타카 박사의 책.

도리우미 박사는 이번 책의 모태가 된 박사 학위 논문(‘일제하 일본인 토목청부업자의 활동과 이윤창출’, 서울대 국사학과, 2013년)에서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투자’했다는 자본이 어떻게 사용됐으며, 결국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갔는지를 규명했다. 일제강점기 철도 건설이나 산미증식 계획의 수리조합 사업 등 공공 공사에 필요한 자금은 매년 일본 본국에서 조선총독부에 보태주는 돈으로 상당 부분 충당됐다. 하지만 이들 돈은 일본 토목청부업자(토목건설업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조선인 토목청부업자들이 더러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싹이 말랐다. 조선총독부가 공공사업을 발주하면서 경쟁 입찰 대신에 지명 입찰이나 수의 계약 등의 방법으로 조선인의 참여를 원천 배제했기 때문이다. 댐이나 저수지 공사 등 토목건설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수리조합 사업 역시 일본 사업가들의 독무대였다. 이들 일본 사업주는 조선인들에게 임금 지급도 당시 신고 가격의 3분의 1 수준으로 후려쳤다. 총독부의 통계연보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일당이 일본 노동자의 절반인 1엔이라고 적혀 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30~40전, 심지어는 20~30전만 지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실질 임금은 도리우미 박사가 일본 청부업자들의 회고록 등 생생한 자료를 뒤져서 찾아낸 성과다. 그러한 불공정, 편법을 식민지 당국이 방관하고 조장했기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식민지 시기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착취이자 수탈이 이뤄진 때라는 것이다.

강압적 폭력을 동원해서 재산을 빼앗는 행위를 의미하는 직접적 수탈보다 식민통치 세력의 비호 아래 이뤄진 구조적 수탈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목건설 사업 이외에서도 구조적 수탈이 이뤄졌나?

“두가지 중요한 기제가 있다. 하나는 금융이다. 대한제국 때 만들어진 은행을 합방 뒤 일제가 완전히 장악했고, 그때부터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했다. 즉, 일본인에게는 저리로 대출을 적극적으로 해주었는데 조선 사람들에게는 안 해줬다. 그러면 조선인은 주변에 있는 일본인에게 고리대금으로 사채를 빌려야 했다. 결국 일본인은 조선인을 상대로 앉아서 돈놀이를 했고, 결국 조선 사람의 돈이 일본인에게 흘러간 것이다. 또 하나는 식민 시기의 구조적인 폭력이다. 회고록 등 당시 기록을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 가서 물건값이 비싸다면서 때려서 가격을 싸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사적 폭력을 경찰은 방치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손해를 봐도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 사업주들이 아예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도망가는 사례도 많았다. 이처럼 일본인 입장에서는 폭력 등을 이용해 실생활에서 이득을 봤지만, 한국인은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착취도 수탈도 없었다는데 왜 가난한 상태로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은 모두 부자가 됐고, 조선인은 거의 전부 가난해졌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공부해보니 역시 일제의 구조적인 수탈이 있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일본인 학자 도리우미 유타카 박사가 지난 25일 한겨레신문사 정원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되려면

그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식민지 조선을 ‘쌀 모노컬처(단일작물) 경제’로 만들었다는 점도 책에서 주요하게 지적했다. 1941년 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났던 경성상공회의소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본국 관리나 정치인들은 일본 본토의 공장과 경쟁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공업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메이지유신 초기에 자국에서는 ‘식산흥업’(정부가 주도적으로 산업과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 공업을 발전시켰던 일본이 조선에서는 관영 공장을 전혀 짓지 않았다. 만주사변(1931년) 이후에 한반도 북부지방에 공장이 세워졌지만, 이는 만주라는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발판이었지 조선의 공업 발전을 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인으로서 일제의 조선 수탈론을 얘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일본에서 공격을 많이 받지 않나?

“나에 대한 공격이 많지만, 두렵지 않다. 일본 우익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일본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외국인을 위해 열심히 하고 외국인들에게 칭찬받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스기하라 지우네(2차 세계대전 말에 리투아니아 일본영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지낸 인물로 본국 정부의 거부 명령을 어기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던 유대인 수천명에게 비자를 발급해 이들의 목숨을 구했음) 같은 사람이다. 스기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외무성에서 해고당해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스라엘 정부가 표창장을 주자, 일본 우익들은 ‘이것이 일본정신이다’라며 그를 떠받들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들이 지금은 나를 공격하지만 10년 뒤에는 좋아할 것이라고 본다.(웃음)

예전에는 나도 일본의 문화나 생활습관 등이 세계의 표준이고 제일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이 이상하다고 봤다. 그런데 깊게 알고 보니까 일본이 이상하고, 세계의 보편문화에서 뒤처져 있더라. 소수자를 존중하고 피해자나 약자를 고려하는 게 부족하다.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되려면 가까운 한국에서 배우는 게 가장 빠르다. 한국인이나 재일한국인에 대한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그런 일에 도움 되는 역할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다.”

도쿄에서 나고 자란 도리우미 박사는 일본 와세다대 경제학과를 졸업(1986년)한 뒤 직장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2000년 뒤늦게 한국사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가 매일같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마침 모교에 아시아태평양연구과가 생겨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사 박사 과정을 공부할 데가 없어 2003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현재 한국역사연구원(원장 이태진)의 상임연구위원으로 일하며, 선문대에서 강의한다.

“일본 우파도 설득 여지 있더라”

―최근 과거사 문제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이 나빠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베 정권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과거사 문제는 다 끝났으며, 한국 법원이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한 일본 기업들의 위자료 지급을 판결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징용 노동자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오히려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했다. 1932년에 일본은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고 비준까지 했다. 이 국제협약에는 강제노동이 금지돼 있다. 전시라도 식민지인 조선인을 동원하면 안 되고, 또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다루면 안 되게 규정돼 있다. 개인들의 청구권은 당연히 남아 있다.”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까?

“불매운동은 조금 아닌 것 같다. 자주 가는 스시집 주인이 한국인인데 내가 미안할 정도로 장사가 어렵다. 불매운동은 이처럼 양국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많이 나온다. 그런 것보다는 문화의 힘으로 밀고 가면 좋을 것 같다. 한국이 드라마를 진짜 잘 만드는데, 일본인들이 자연스럽게 반성할 수 있는 내용을 드라마에 담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본 사람이 차츰 바뀌어가도록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길이 아닐까 싶다.”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러나 조금씩 변화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일본 우파들과 많이 논쟁하면서 그런 것을 느꼈다. 그들이 일제의 조선 지배가 좋은 거였다니 어쩌니 하는 데 대해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하면 엄청난 반발이 터져나온다. 이에 대해 그들 얘기를 들어주면서 하나하나 반박을 해나간다. 물론 그들 중 70~80%는 여전히 자기 의견을 고수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신 덕분에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런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것을 보면서 상대가 나쁘다고 해서 적으로 취급해 외면할 게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면서 꾸준히 조금씩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어렵고 무겁게 생각하면 견딜 수 없으니까 조금씩 가야 한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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