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시시각각] 머릿 수 많으면 유죄도 무죄되나

전영기 2019. 9. 3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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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이 필요한 건 문재인 대통령
이승만 때 보다 심하게 검찰 겁박
깨어있는 시민이 민중 독재 막아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왕조 시대에 왕은 죄를 짓는 존재가 아니었다. 민주공화국 시대엔 대통령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처벌받는다. 1970년대 미국 닉슨 대통령이 수사방해 혐의로 사임했고, 2016~2017년엔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수사를 받기 시작해 탄핵된 뒤 수십 년 징역 판결을 받았다. 한국의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끝까지 죄를 파헤치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갖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대통령의 아들을 구속시켰고, 김대중 대통령 때 마녀사냥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옷로비 사건의 김태정 법무장관을 구속시켰다. 노무현 대통령 때 송광수 검찰총장은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샅샅이 수사했다.

물론 검찰의 잘못도 많았다. 피의사실을 흘려 모욕을 주거나 먼지털이식 과잉 혹은 심증에 의존한 헛발질 수사가 적지 않았다. 그런 경우 사법부가 무죄 판결로 검찰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언론과 여론이 나서 경종을 울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검찰 수사는 진화해 왔다. 개혁이 필요하다 해도 지금처럼 집권층이 검찰청사 앞으로 지지 군중을 동원해 특정 사건의 수사를 훼방놓는 방식으로 할 일은 아니다.

성역 없는 비리 수사라는 검찰의 본질적 기능이 중단돼야 할 정도로 우리 검찰은 타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수가 많으면 유죄도 무죄로 만들 수 있다는 권력의 병든 정신을 문제삼을 때다. 권력의 절대부패를 막아낸 면에서 검찰은 공이 과보다 많다. 크게 봐서 한국의 사법제도나 검찰의 수준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최근 국제검사협회라는 세계 기구의 회장에 한국의 검사(황철규)가 선출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한국의 검찰은 과거 어느 때보다 증거가 가리키는 대로 법적 절차를 준수하며 죄가 있는 곳을 찾아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다. 그런 검찰을 향해 “아내가 힘들어 하니 압수수색을 신속히 해 달라”는 법무장관의 가족주의적 전화가 수사 방해가 아닐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왕조 시대의 왕이 아니라는 인식이 절실하다. 대통령 권력을 행사할 때 스스로 엄중히 경계해야 한다. 지난주 문 대통령은 조국씨에 대한 수사를 언급하면서 “검찰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검찰은 성찰하라”고 비판했다. 대통령은 통치권 차원에서 검찰 개혁에 진지한 관심을 표명했다고 하겠지만 많은 사람은 조국에 대한 수사 간섭과 방해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조씨 수사에 매진하고 있는 검사들에게 위압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성찰이란 단어는 조국씨가 애용하는 말인데, 문 대통령도 같은 용어를 써서 기묘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임명할 때 “우리 총장님, 살아 있는 권력에 엄정하게 해달라”고 해놓고 범죄 혐의 물씬 나는 조씨를 법무장관에 앉힌 문 대통령이야말로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측근인 임영신씨를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서울지검장 최대교(1901~92)가 임 장관을 뇌물죄로 구속시켰다. 임영신은 수사망이 좁혀 오자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가 구명을 읍소했다.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 중단을 은밀히 지시했고, 장관은 검찰총장을 통해 최대교 검사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최 검사장은 거부했다. 그는 현직 장관을 소환조사해 헌법이 검사에게 부여한 기소독점권을 행사했다. 그 배경에 이승만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김병로 대법원장의 사법부가 있었다. 최대교의 검사적 정의와 사법부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한국 최초로 살아 있는 권력의 구속을 이끌어냈다.

이 사례를 보니 문재인 집권 세력의 검찰 겁박이 70여 년 전 이승만 때 보다 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제 권한을 행사하는 깨어 있는 시민, 판사, 기자, 검사, 학자, 학생, 야당 세력이 있어 고맙다. 이들이 살아 있는 한 1인 독재든, 민중 독재든 민주공화국을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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