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동영상에 고속철역 큰불까지..자존심 구긴 사우디

조영빈 2019. 9. 3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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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최초 고속철도 역사에 원인불명 화재

석유시설 공격 배후 자처한 후티는 사우디 포로 영상 공개

29일 예멘의 후티 반군이 “나즈란 전투에서 승리한 증거”라며 공개한 동영상의 한 장면. 민간인 복장의 남성들이 떼지어 이동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세계 최대 석유 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자존심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자국 석유 생산 심장부가 무인기(드론) 공격에 뚫리더니, ‘중동 최초의 고속철도’라고 자랑했던 하라마인의 역사(驛舍)에 원인불명의 대형 화재까지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사우디 석유시설을 공격(9월 14일)했다고 자인했던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 패잔병들을 생포했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공개했다. 사우디는 배후에 있는 이란에 대응하고 후티 반군에 대대적 보복 공격을 감행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나 ‘유가 관리’ 필요성에 이렇다 할 대꾸도 못 하는 무기력함을 보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29일(현지시간) 사우디 경제 중심지 제다에 위치한 고속철도 하라마인 역사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최소 5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알-이크바리야 사우디 국영방송은 “오후 12시35분 화재가 발생한 뒤 4시간 이상이 흘렀으나 여전히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며 “고속철도 운행은 안전상의 이유로 잠정 중단된다”고 전했다.

하라마인은 사우디가 2009년 3월부터 약 10년 간 73억 달러를 들여 건설한 중동 최초의 고속철도(길이 450㎞)로 지난해 9월 25일 개통됐다.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는 물론 남부 항구도시 제다와 압둘아지즈 국제공항, 압둘라국왕 경제시티를 잇는다. 종교ㆍ경제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상징성이 큰 철도지만, 사우디 정부는 화재 원인을 특정 짓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번 화재는 사우디가 ‘중동의 관광대국’을 선언한지 이틀 만에 발생해 망신을 더했다. 주변 적대 세력의 테러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29일 현재까지 배후를 자처한 곳은 없는 상태다.

완공 1년에 불과한 최신 역사를 불태운 것 이상으로 자존심을 구긴 것은 후티가 이날 공개한 한편의 동영상이다. 알자지라 방송에 따르면, 후티는 이날 알마시라 방송을 통해 자신들이 생포한 사우디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앞서 28일 사우디 남부 국경 지역인 나즈란에서 사우디 주도 아랍동맹군 3개 여단과 전투를 벌여 완벽하게 승리했다고 주장한 데 이어 그 증거 영상을 공개한 것이다. 동영상에는 두 손을 들고 떼지어 이동하는 민간인 복장의 남성 수십 명과 불타고 있는 사우디군 차량, 사우디 군복 차림의 시신, 노획한 수백여 점의 총기 모습 등이 담겼다. 후티는 “사우디군 사상자가 500여명이며 2,000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 이 동영상으로 실제 수 천명의 사우디군이 생포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우디가 이번 전투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점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는 후티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예멘 반군을 진압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 14일 발생한 대규모 석유 시설 피습 사건 이후 사우디는 유가 관리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중동 지역 군사적 긴장감을 사우디가 먼저 상승시킬 수 없는 처지인 셈이다. 특히 사우디는 석유 시설 피습 사건 뒤 이란제 미사일 파편까지 공개하며 공격 주체를 이란으로 단정지은 상태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후티에 대해 대규모 공습을 벌일 경우 자신들이 공격 주체로 지목한 이란은 정작 놔둔 채 다른 곳을 타격하는 다소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며 “포로 동영상 공개로 사우디 왕실은 큰 충격을 받았겠지만, 뚜렷한 대응책도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난감한 처지는 사우디 실권자이자 국방부 장관을 겸직하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이날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국제사회가 나서 이란의 군사도발을 막지 않으면 “우리가 평생 보지 못했던,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국제유가가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군사적 대응에 직접 나서기 어려운 탓에 이란 제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호응을 요청한 것이다. 예멘 내전과 관련해서도 무함마드 왕세자는 “정치적 해법과 관련한 모든 계획에 열려 있다”며 군사조치가 가 아닌 외교적 해결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mailto:peoplepeople@hankookilbo.com)

사우디아랍아의 제다에 위치한 하라마인 고속철도 역사에서 29일 발생한 대형 화재로 검은 연기가 역사 상공으로 솟아 오르고 있다. 제다=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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