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취재파일] 정경심의 '슈퍼갑질'과 공정한 비판

임찬종 기자 2019. 10. 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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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은행에 거액을 맡긴 큰손이 있습니다. 큰손이 '갑'이라면 돈을 관리하는 지점장은 '을'입니다. '갑'님이 가끔 부당한 요구를 해도 ‘을’은 이를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손은 은행에 와서 고객 응대가 시원치 않다며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VIP 고객에게는 마카다미아를 대접해야 하는데 땅콩을 내왔다는 겁니다. 지점장은 억울하고 분했지만 '갑'님이기 때문에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뒤, 지점장은 큰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큰손은 자기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도저히 정상적으로 살 방법이 없으니 아무도 모르게 훔쳐오라고 지점장에게 ‘부탁’했습니다. 지점장은 도둑질을 했다가 적발되면 형사처벌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갑의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기 때문에 무서움과 떨림을 참고 도둑질을 했습니다.
 
*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 아래 주소로 접속하시면 음성으로 기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https://news.sbs.co.kr/d/?id=N1005460964 ]


● 어떤 '갑질'이 더 나쁜가?

큰손이 지점장에게 저지른 두 가지 행위는 누가 보더라도 '갑질'입니다.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트렌드 지식사전)이라는 '갑질'의 정의(definition)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카다미아가 아니라 땅콩을 내왔다고 패악을 부린 행동과, 어디 가서 물건을 훔쳐오라고 강요한 행동 중에 어느 쪽이 더욱 죄질이 나쁜 '갑질'로 볼 수 있을까요?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의 죄질이 더욱 나쁘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전자 역시 공개된 장소에서 권리관계에서 약자에 있는 '을'의 인격을 모욕한 행위이므로 잘못된 행동이지만, 적발될 경우 형사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구속까지 감수해야 하는 불법행위를 강요한 쪽이, 을의 입장에서 입는 피해나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훨씬 더 나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전자가 그냥 ‘갑질’이라면 후자는 T.O.P… 가 아니라 '슈퍼갑질'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갑질’과 관련해 길게 설명한 것은 조국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행동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섭니다. 정경심 교수가 받고 있는 혐의 중 하나는 증거인멸죄의 교사 혐의입니다. 자신의 범죄 혐의와 관련된 증거를 인멸하라고 타인에게 지시(교사)한 혐의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자산을 관리하는 한국투자증권 PB(Private Banker, 거액 예금자의 자산을 개인적으로 관리해주는 은행 직원)에게 경북 영주에 있는 동양대학교까지 함께 내려가 자신이 수사를 받고 있는 혐의와 관련된 파일들이 저장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교체하고, 자신의 자택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도 교체하며, 교체한 하드 디스크 들을 PB의 차량 트렁크에 보관하고 있으라고 지시한 혐의입니다. (※ 이상의 사실관계는 검찰이 공표한 것도 아니고 정 교수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한투 PB 김 모 씨 측이 직접 언론에 설명한 내용입니다.)

● 사실이라면…형사처벌받을 일 해야 했던 한투 직원

문제는 한투 PB 김 모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 모 씨는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김 씨에게 적용되는 혐의는 증거인멸죄입니다. 형법 155조에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은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한" 사람을 처벌하도록 규정된 죄입니다.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집니다. (참고로 이 글 앞부분의 예화에 나오는 절도죄를 저지르면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집니다.)

즉, 김 씨는 자신의 회사에 거액을 맡겼을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자기 회사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고위공직자의 아내라는 '슈퍼 갑'의 지시를 받고, 적발될 경우 형사처벌을 받는 불법행위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입니다. 김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경심 교수의 이 같은 행위를 '슈퍼갑질'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정경심 교수는 한투 PB 김 모 씨의 주장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언론사들의 수십 차례의 요구에 모두 직접 대응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다만, 정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언론에 불거진 의혹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라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앞부분에 써놓은 예화로 돌아가 보죠. 첫 번째 예화는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구성원인 조현아 씨의 '땅콩회항' 사건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박창진 사무장 등이 나중에 인사 불이익 등을 받기 이전에도, '땅콩회항' 사건 자체가 언론을 통해 폭로됐을 때 많은 사람이 분노했습니다.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을 부당한 이유로 공개된 장소에서 모욕한 '갑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크게 논란이 되면서 이후 비슷한 유형의 '갑질'이 사회 곳곳에서 폭로되기도 했습니다. 조현아 씨는 이와 관련해 항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현아 씨의 행동은 당연히 잘못된 행동입니다. '갑질'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는 행동이었죠.

● '땅콩회항 갑질'로 비판받은 조현아…정경심의 '슈퍼갑질'은?

그렇다면 앞서 훨씬 더 죄질이 좋지 않은 '슈퍼갑질'이라고 평가했던 두 번째 예화의 경우는 어떨까요? 역시 눈치채셨겠지만 조국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한투PB 김 모 씨에게 한 행동이라고 사건 당사자인 김 씨가 언론에 공개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물론 절도죄는 아니고 증거인멸죄이고 절도죄가 증거인멸죄보다 법정형이 조금 높긴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라고 주장하시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정경심 교수의 행동은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형사처벌을 받는 불법행위를 사실상 강요한 행위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을’이 입는 피해를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슈퍼갑질'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정경심 교수가 저질렀다고 지목된 행동이 '슈퍼갑질'이라는 점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약자'를 자처하거나 '약자로서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 교수의 행태 때문입니다. 물론 아무리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삶의 모든 국면에서 '강자'이거나 '갑'일 수는 없습니다. 설사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특정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앞에서는 '약자'가 될 수 있겠죠.

정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사에 대한 일반적 지휘권과 인사권을 행사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무부 장관의 아내라고 하더라도 수사를 받는 당사자라는 입장만 놓고 보면, 그 상황에서는 '약자'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강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고 해서 '약자'라는 점을 호소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특히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갑질'을 한 혐의로 수사를 받는 사람이 '약자'라는 식으로 행사하면 오히려 여론의 더 큰 비난을 받기 마련입니다.

● 정경심은 '약자'인가? - 조현아와의 비교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대한항공 오너 일가인 조현아 씨의 경우를 생각해보시죠. 조현아 씨는 '땅콩회항' 관련해서 검찰로부터 항공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도 법조계에서는 조현아 씨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지만, 검찰이 이를 항공기의 항로를 변경하게 한 행위를 처벌하는 항공법 위반 혐의로 수사하는 것에는 회의적 시선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대법원에서 조현아 씨는 이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확정받았죠.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조현아 씨가 검찰과 대비해 수사받는 상황에서는 상대적 약자라는 점을 내세우며, '약자의 권리'를 호소했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법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사회적 주요 인사, 특히 고위공직자와 특수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 역시 공정해야 합니다. 정경심 교수의 행동은 만약 사건 당사자인 한투 PB 김 모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슈퍼갑질'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슈퍼갑질'의 당사자이자 검찰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법무부 장관의 아내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약자'를 자처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도 지금까지 있었던 다른 경우에 비춰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정 교수는 증거인멸죄의 교사 혐의 말고도 공문서 위조(KIST 인턴 증명서 부정발급 의혹 관여 혐의), 사문서 위조(동양대 총장 표창장 위조 혐의), 공무집행 방해(국립대로서 공공기관인 부산대학교 의전원 입시 전형에 허위서류를 제출하는 일에 관여해 입시 업무를 방해한 혐의), 업무방해(부산대 외 다른 사립대 등 입시 전형에 허위서류 제출하는 것에 관여해 사립대 입시 업무를 방해한 혐의), 공직자 윤리법 위반(사모펀드 관련 허위 재산신고 및 직접투자 혐의), 횡령 및 주가조작 혐의(사모펀드 등과 관련해 조국 장관의 5촌 조카 조 모 씨의 혐의의 공범 혐의) 등도 받고 있는 피의자이기까지 합니다.

(※ 다시 밝히지만 정경심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에게 제기된 각종 혐의나 의혹에 대해 대부분 부인하다는 취지의 글을 여러 번 발표했습니다.)

● 정경심 교수의 혐의를 중대하지 않다고 볼 수 없는 이유

물론 정 교수의 혐의는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 때 조현아 씨의 혐의가 그랬듯이 아직 법원을 통해 유죄로 확정된 사실이 전혀 아닙니다. 사실관계 자체가 다를 수도 있고, 도덕적 문제가 있더라도 법리 적용이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경심 교수가 받고 있는 혐의는 '표창장 위조 혐의' 정도에 불과하거나, 다른 사건에 비춰봐서 별 거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전혀 아닙니다. 특히 정 교수가 검찰 수사에 공식적·비공식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법무부 장관의 아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법 절차의 평등과 관련해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은 정경심 교수를 수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이 얼마 전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삼성바이오 직원 여러 명을 구속했습니다. 아래로는 말단 대리부터 위로는 부사장까지 직급도 다양했습니다. 이들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된 혐의가 바로 지금 정경심 교수가 받고 있는 혐의 중 하나인 증거인멸죄(교사)입니다.

검찰이 정 교수를 수사하는 방식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사 착수 시점이나 수사 인력의 적정성 여부도 시간을 두고 찬찬히 따져볼 만한 대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정 교수가 받고 있는 혐의가 별거 아니라거나, 중대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사실을 왜곡하는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누군가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썼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찬종 기자cjy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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