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침묵의 살인자 안보이나..저물가보다 겁나는 '물가 인식'

김기환 2019. 10. 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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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최근 물가를 두고 ‘사상 최저’ ‘사상 최장’ 경제지표가 쏟아졌다. 불행하게도 희소식은 아니었다. 통계청이 지난 1일 발표한 ‘9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0.4% 하락했다. 사상 처음 물가상승률이 뒷걸음친 8월(-0.04%)에 이어 두 달째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65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54년 만에 최저치다.

문제는 ‘반짝’ 저물가가 아니라 추세적인 저물가란 점이다. 물가는 올해 1~7월 0%대를 기록했다. 그러다 지난 8월 -0.04%로 돌아선 뒤 9월 -0.4%로 하락 폭이 커졌다. 앞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2~9월 당시에도 8개월 연속 0%대 물가를 기록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일본식 장기 불황’에 들어설 조짐이 보인다”고 우려했다.

경제 체질이 건강한데 물가까지 내리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현재 저물가 기조는 이와 다르다. 경제 활력이 떨어지면서 민간 소비와 기업 투자 등 내수 부문 총수요가 크게 위축한 것을 보여주는 신호다. 디플레이션(deflation)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디플레이션은 단순 저물가가 아니라 ‘경기 침체와 맞물린’ 지속적인 물가 하락을 뜻한다. 어느샌가 찾아와 경제를 좀먹기 때문에 ‘침묵의 살인자’로 불린다.

무엇보다 저물가에 대한 정부 인식이 우려스럽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물가동향 발표 직후 지난해 농ㆍ축ㆍ수산물 가격 폭등 및 높았던 물가상승률(2.1%)에 따른 ‘기저효과’, 유가 하락, 무상복지 확대 등을 이유로 들어 저물가를 ‘변호’했다. “물가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해서, 광범위하게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은 아니다”라며 “연말에 물가를 회복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외환위기ㆍ금융위기 같은 외부 충격이 없는데도 물가가 마이너스로 돌아선 데 대한 ‘위기의식’은 느낄 수 없었다.

선진국은 최근 디플레이션과 전쟁에 한창이다. 경기 과열을 우려해 물가를 끌어내리던 과거는 옛말이고, 어떻게든 경기를 부양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일제히 중앙은행 기준 금리를 내리고 재정을 풀어서라도 경제 성장을 유도하는 추세다. 저성장 시대를 맞아 ‘물가 안정’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장기 불황)’의 출발점이 디플레이션이란 점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맞아 뒤늦게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내리고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일본 경제 경향을 따르는 한국 경제 특성에다 세계 최저 수준 출산율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디플레이션에 진입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디플레이션마저 일본을 따를 순 없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디플레이션이 닥칠 때 신중하게 접근하면 위험을 더 키울 수 있다”며 “디플레는 뒷북보다 차라리 과잉 대응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정부는 경제주체에 부담을 주는 ‘소득주도성장’ 기조부터 바꿔야 한다. 재정ㆍ통화 정책은 유연하고, 적극적인 기조로 가야 한다. 규제 개혁을 비롯한 모든 정책 수단을 활용해 꺼져가는 경제 성장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 침묵의 살인자가 다가오는데 무방비로 당할 순 없지 않나.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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